할로 죽이고 방으로 살리고
글 원철스님
<3> 禪ㅡ敎 대표인물 가섭과 아난
현재 우리가 알고 접하고 있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는 부처님 당시
두 사람의 본래색깔이라기 보다는 후대 선종이라는 가치관이 알게 모
르게 투영된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초창기 교종의 득세 속에서 선종은 율종사찰에 당우 한 칸을 얻어
더부살이를 하는 처지였지만 수행에만 전념했다. 두타행을 자청하고
고행에 익숙한 그들의 눈에 교가(敎家)란 부처님 말씀을 앵무새마냥
외우는 그런 부류로 비쳐졌을 것이다. 마음의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똥닦개 같은 대장경을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 눈 어두운 무리들로 치
부했다. 이런 저변의 기류는 나중에 가섭존자가 주관하는 결집에 아난
존자는 부처님말씀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그래서 절대로 빠질 수 없
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집장소 대문 밖으로
쫓겨나는 수모를 감수해야만 했다.
가섭존자는 두타행자로서 가장 선종적인 이상적 인간상에 근접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삼처전심의 주인공이다. 부처님께서 꽃을
드시니 가섭만이 웃었다는 그 유명한 '염화미소'를 비롯해 늦게 온 가
섭존자를 위해 부처님께서 당신의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주었다는'다
자탑전 반분좌' 와 열반하신 부처님께서 늦게 도착한 가섭을 위해 관
밖으로 두 발을 내어 보이셨다는 '곽시쌍부'를 통해 부처님의 심인(心
印)을 바로 전수받은 선종 2대 조사의 모습으로 정착시켰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가의 대표적 인물인 아난까지도 가섭에게 "세존께서 금
란가사를 전해주신 이외에 무슨 법을 전해 주셨습니까? (선문염송 81
칙)"라고 되묻는 것으로 '선종적 매듭' 을 짓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부처님의 말씀도 '선어록'의 범주에 포함시키려는 노
력을 병행했다. 최초의 선종전등역사서라고 알려져 있는 <보림전>에
는 <사십이장경>의 전문(全文)이 실려있다. 경전을 부분적으로 인용
하는 것이야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전문을 최초의 선종사서에다
가 일부러 싣고 있는 것은 무언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중국인들
에게 최초로 전해진 경전이 <사십이장경>이었다. 그래서 <보림전> 이
편찬될 무렵 이 책은 이미 중국인에게 불교개론서 역할을 하면서 자
연스럽게 대중화되어갔다.
선가에서는 이를 선종적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보림전>이라는 전
등사서 속에 편입시켰다. 이는 <사십이장경>을 선종의 초조인 '부처
님 어록'이라는 지위와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정지작업이었다. 우리들
이야말로 부처님의 마음에 가장 부합된 수행자라는 사실을 내외에 과
시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선가의 사상적 수행적 우월감과 자신감
의 반영이라 하겠다. 이렇게 하여 <보림전본 사십이장경> 을 '최초어
록'으로 규정했다. 이는 뒷날 깨침의 언어인 선어록을 경전과 동등한
위치를 부여하기 위한 기반마련이 그 목적이다. 그리하여 <사십이장
경> <유교경(遺敎經)과 함께 위산선사의 어록 <위산경책> 까지 합하
여 '불조삼경(佛祖三經)' 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선종의 필독서로 권
장되면서 어록과 경전을 같은 무게로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역사란 근본적으로 현재의 역사가 될 수 밖에 없다. 이 모든
것들이 선종이 중국의 불교계뿐만 아니라 사상계를 완전히 평정하면
서 기존의 종파불교까지 완전히 흡수. 소화시킨 새로운 수행불교의 완
성을 의미한다. 즉 불교의 역사 역시 선가의 관점에서 다시 선종사라
는 이름으로 새롭게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각 역시 당송(唐宋)
시대의 선종전성기의 관점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4> 아난. 마영. 용수. 세천을 선종조사로 끌어들인 이유
선종의 법맥도를 살펴보면 특이한 것이 눈에 뜨인다. 아난존자를 필
두로 세친 마명 용수 등 전혀 선종적 이미지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인물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
관없이 선종의 조사로 편입되어버린 것일까? 만약 다시 환생하여 이
전등법계도를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실까 자못 궁금하다. 위상을 제
대로 부여해 놓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긍정하실
까? 아니면 이맛살을 찌푸리고 난 후 그냥 모른척하면서 지나가실까?
그 해답은 아마 이럴 것이다. 선종승려로 출가해 있다면 전자일거고
그렇지 않다면 후자일 것이다.
<조당집> '가섭'편에는 제1차 결집에 참여하지 못한 아난존자의 고
뇌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나는 부처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겼고 계를 범한 적도 없는데 왜 깨치
지 못했는가?"
그 누구보다도 신심 있고 투철한 지계의식으로 잘 살았노라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던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였다. '왜? 왜? 왜?'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밤새도록 거닐다가 새벽이 되니 몹시 피곤하여 잠시
누우려는데 머리가 목침에 닿기 전에 깨달음의 지위를 얻었다. 그 기
쁨을 이기지 못한 채 곧장 결집장소인 빔빌라굴로 가서 돌문을 두드
렸다. 그리하여 문고리 구멍을 따라 들어갔다.
'왜?' 라는 의문은 의단이 되었고 그것은 하룻밤의 용맹정진으로 이
어져 마침내 머리가 목침에 닿는 순간 깨침을 얻게 되었다는 내용이
다. 일부 다른 문헌에는 결집장소에서 쫓겨난 아난이 대분심을 일으켜
절벽 위에서 졸음을 쫓기 위해 한쪽 발로 서서 용맹정진한 끝에 깨달
음을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쨌거나 아난존자가 선종적인 방법론
으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결론은 내용적으로 일치한다.
마명 역시 그의 스승 11조 부다야사와의 대화에서 선사적인 모습으
로 그려져 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그대가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지금 모르는 그것이 부처이니라."
선종의 서천조통설의 특색은 마명(12조) 용수(14조) 세친(21조) 등의
인도대승불교 각파의 조사들을 선종의 전법조사의 한 사람으로 끌어
들인 것은 선종이 종래의 모든 종파를 종합하고 있다는 점을 과시한
것이다. 다시 말해 불교전체를 선의 실천으로 통합한 것이라 할 수 있
다.
작금에도 근래에 돌아가신 어른스님들은 이판사판을 막론하고 비문
에는 '선사' '대선사' 칭호로 불리운다. 살아있는 사람도 누구든지 '00수
좌'라고 불러주면 윗사람이 아랫살마을 배려한 호칭이 된다. 수좌는
수자(修者)가 언제부턴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수자는 수선자(修禪
者)라는 말이다. 진짜수좌(首座)는 총림에서 방장 다음의 가장 윗자리
에 앉는 어른을 가리킨다. 그렇거나 말거나 수자를 수좌하고 부르는
것이 이미 통용되고 있으니 그냥 그대로 사용하면 될 일이다. 어쨌거
나 수좌(수자)는 언제부턴가 선종의 모든 승려를 부르는 호칭으로 굳
어졌다. 선종의 입장에서는 설사 도심지 포교당에서 살고 있더라도 살
고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선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수좌'라고 불리
더라도 별로 잘못된 일은 아닌 것이다. 이래저래 선종적 정서는 출가
자 모두의 면면에 흐르는 어쩌면 또 하나의 업(業)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서론은 이정도로 해두고 이후부터는 처음 의도한대로 선종승
려의 재미있는 일화를 통하여 수행과 삶이 둘이 아닌 그들의 일상적
인 모습을 통해 이 시대를 밝힐 수 있는 지혜를 얻는데 보탬이 되고
자 한다.
佛 心
불기 2551년 6월(통권66호)
대한불교조계종 법 왕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