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은 젬병 공부에는 욕심쟁이/ 반기문
대부분의 아이들이 "누가 오자미(모래 주머니)를 더 멀
리 던지는지 해보자." "누구 주먹이 더 센지 겨뤄보자" 라는
시합을 할 때, 기문은 "누가 단어를 더 많이 외우는지 해보
자." "누가 더 빨리 계산을 하는지 해보자" 라는 시합을 벌이
곤 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가는 길엔 친구들에게 "오늘
국어 시간에 배운 문구를 누가 더 잘 외는지 보자" 해서 친
구들을 어이없게 하곤 했다. 자칫 '공부 하나 잘한다고 재는
밥맛 떨어지는 녀석' 으로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
문을 그렇게 생각하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기문의 품성이
워낙 착하기도 했고, 아이들도 기문이에겐 그것이 재미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기문이 6학년 때 같은 반에 한승수라는 공부를 잘하
는 친구가 있었다. 기문과 승수는 자주 비교가 되어 둘은 일
종의 라이벌이었다. 차분하고 영리한 승수는 주산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였다. 주산 대회를 앞두고 기문은 한승
수를 붙잡고 누가 주산을 더 빨리 하는지 겨뤄보자고 했다.
반기문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주판으로 셈하는 주
산을 장려했다. 산수 시간에 주산을 따로 가르치고 주산대회
도 종종 있었다. 승수는 기문의 말에 주판을 꺼내 따라락 하
고 줄을 맞췄다. 심판을 맡은 친구 하나가 숫자를 부르기 시
작했다.
"35 곱하기 24에 541을 빼고 7,832를 더하고 다시 81
을 빼면?"
"8,050."
승수가 먼저 외쳤다. 몇 번 더 했지만 승수 녀석이 언
제나 더 빨랐다. 먼저 내기를 건 반기문은 머쓱했다. 그런데
도 다음날 또 다시 승수에게 겨루자고 했다.
"승수야, 오늘 한번 더 해보자!"
"에이, 어제 졌으면서 하루 만에 뭘 또 하자고 하냐?"
"그래도 한번 해보자고."
그 이후로 둘의 주산 시합은 매일 이루어졌다. 시합을
하면서 기문의 주산 실력은 자꾸 좋아졌다. 결국 승수가 손
을 들고 말았다. 기문은 결국 학교 대표로 주산대회에 나가
게 됐다.
기문은 다른 것에는 욕심이 없이 얌전한 편이었는데
공부에서만은 달랐다. '누구보다 잘하겠다' 는 경쟁심이 강
하거나 '반드시 꺽고 말겠어' 라는 승부욕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수준보다 더 잘하고 싶다는 그런 순수한 욕심이었다.
기문에게 공부, 학문은 그 자체가 하나의 흥미로운 세계였
다. 모르는 것을 하나씩 알아간다는 것, 더 잘 알아간다는 것
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런 기문에게 이런
공부 내기는 하나의 게임이었다.
재미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기문도 그랬
다. 집에 변소가 마당 건너편에 있었는데, 밤에 그것도 겨울
에는 변소를 한번 다녀오면 잠이 다시 들기가 쉽지 않았다.
반기문은 억지로 잠을 청하기보다는 책을 읽었다. 같은 방을
쓰는 동생들은 불 좀 끄라고 핀잔을 줬다.
"미안, 형이 잠이 안 와서. 조금만 더 읽다가 불 끌게."
그러면서 동생들의 머리 위로 이불을 덮어씌워 주었
다. 동생들은 더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동생들도 영 잠을
못 이루겠으면 형 옆에 앉아서 함께 책을 읽곤 했다.
기문은 집중이 잘 되는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늦었으
니 그냥 잘까 하다 책을 조금만 보고 있으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얻게 됐다. 공부를 하다 보면 가끔씩 "그래 이거구나!"
하며 깨닫는 순간이 왔다. 이른바 '탄력' 이 붙는 것이다. 공
부에 재미가 붙는 순간이었다. 그러다 보면 몇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특히 모두 잠든 밤에는 집중력이 좋아진다. 비록
다음날 피곤하기는 하지만 놀면서 밤을 새운 것보다는 훨씬
좋지 않은가.
초등학교 졸업 때가 다가오자 담임선생님이 학교로
어머니를 불렀다.
"기문이는 참 우수한 아이인데 앞으로 선생님을 시키
시는 게 어떨까요? 사범 고등학교 부설 중학교로 보내보시
죠. 어머니 생각은 어떠신지요?"
그 시절에는 사범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치면 바로
교사가 될 수 있었다. 대부분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었
기 때문에 가난한 우등생들은 일찌감치 교직의 길을 선택하
곤 했다. 그러면 기본적인 장래가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라고는 하지만 남녀 한 학급만을 뽑는 소수 정예과정
이었다.
어머니 신 씨는 학교에서 인정받는 장남이 기특했다.
그리고 장남이 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도 괜찮을 듯 했다. 하
지만 자식의 장래를 어머니 마음대로만 정할 수는 없었다.
"애 아버지하고 또 기문이 본인한테 한번 물어보고 말
씀드리지요."
퇴근해 들어온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학교에서 선생님
과 이야기한 것을 전하며 기문이의 진로를 의논했다.
"그야 기문이 본인 생각이 더 중요하지. 크게 권유하
지 말고 우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둬 보지 뭐."
어려서부터 영특하기도 했거니와 미련스럽게도 열심
히 공부하는 장남에게 부모는 기대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기문의 부모는 그런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
래서 공부 잘해 출세하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고, 장남이니
집안을 빛내야 한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하지 않았다. 어쩌면
기문이 공부가 출세의 원천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시대를
살아오면서도 목적에 상관없이 순수하게 공부 그 자체를 즐
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장남에 대한 기대를 내놓고 드러내
지 않은 부모의 배려 덕분이었을 것이다.
저녁상을 물리고 아버지는 기문을 불렀다.
"담임선생님이 네가 사범계 중학교로 진학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시더란다. 네 생각은 어떠냐?"
"지금 당장 뭐가 되고 싶다는 건 없어요. 그냥 충주 중
학교에 들어가면 안 될까요?"
기문은 잠간 생각하더니만 대답했다. 그동안 학교에
서 선생님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교사라는 직업
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한번 해볼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없
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막연히 정말 막연히, 더 큰 세상이
자신을 기다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 대신 중학교 가서도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네, 그럼 저 충주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할게요."
동생들과 함께 쓰는 방에 들어오니 안방에서 하는 이
야기를 들은 두 살 아래 동생 기상이가 기문의 곁에 바짝 다
가앉으면서 물었다.
"형아, 충주 중학교 갈 거야? 그럼 나도 따라가야지.
나도 데리고 가 줘. 응?"
"그래. 공부 잘해서 형이랑 같은 중학교 가자."
ㅡ 신웅진《바보처럼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중에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