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어디서 시작될지 모른다/ 반기문
김성태 선생님이 기문을 비롯한 우등생과 모범생을
청소년적십자단에 가입시킨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공부 잘하는 엘리트들은 앞으로 우리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많은 헌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사회와 인류에 대한
봉사 마인드를 키워야 한다는 그의 교육철학 때문이었다. 선
생님의 강력한 권유를 받고 가입하긴 했지만 기문 역시 청소
년적십자단 활동으로 좋은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인류사회에 대한 봉사 정신을 키
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후에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필
요한 소양을 쌓는 데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성품이 곧고 성실한 기문에게 선생님의 기대가 컸다.
기문의 생활, 학습 태도를 지켜보던 선생님이 하루는
기문을 부르셨다.
"기문아, 너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정한 것이
있느냐?"
기문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정치외교학과에 다녔던 것 알고 있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는 네가 외교관이 되면 참 좋을 것 같구나.
넌 영어도 잘하고 사람들과 잘 다투지 않는 성품에다 매너도
참 좋은 아이거든."
"선생님께서 잘 봐주시고 칭찬해주시는 거 감사해요.
이런 조언을 해주셔서 감사하고요. 하지만 아직 진로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진 않았어요. 외교관이라니···."
기문은 선생님이 자신을 과분하게 칭찬해주시는 것
같아 쑥스러웠다. 외교관이라는 직업이 낯설던 시절이었지
만 기문도 오래전부터 그런 꿈을 조금씩 품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외교관' 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적은 없
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외교관이 되어야 할지 생각하기 어
려운 때였다. 그리고 외국은 고사하고 서울도 못 가본 기문
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방학 때 서울 친척 집에 다녀오기도
했는데 기문이네 일가친척들은 모두 충청도에 있으니 말이
다. 당장은 먼 나라 이야기같이 들렸다. 그래도 '외교관' 이
라는 말에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교무실을 나오면서 기문은 '외교관' 이라는 단어를 입
으로 되뇌었다. 낯선 단어였지만 그렇다고 아주 생소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슴을 설레게 하는 단어였다.
기문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당시 변영태 외무부
장관(3대, 1951년부터 1955년까지재임)이전국의 초등학교를 돌
며 강연회를 열었는데 기문이 다니던 충주 교현 초등학교에
도 방문했다. 유명인사가 방문하니 학교에선 꽤 부산을 떨었
다. 아이들이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운동장에 모였다. 그날
변영태 장관은 외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역설하지 않는 대
신 '여러분은 대한민국의 미래, 체력을 키우십시오. 체력은
국력입니다' 라는 주제로 일종의 건강 계몽 강연을 했다. 변
영태 장관은 웃통을 벗고 아령시범을 보이며 단단한 몸매를
과시했다.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장관을 쳐다봤다.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매우 재미있어 했다. 하지만 운동
을 별로 잘하지 못하던 기문은 아령시범보다는 변영태 장관
처럼 우리나라를 위해 외국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훌륭한 사
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 나를 위해 큰 사람이 되라" 는 말씀이 더 기억에 남
았엇다. 변영태 장관의 강연회 이후 기문은 "나도 나라를 위
해 일을 하면 좋겠다"는 말을 식구들이나 주변 친구들에게
꺼내곤 했었다.
그러고 보니 국제적인 일을 한 적이 있기도 했다. 그
때 일이 불현듯 떠어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기문은 헝가리 국민봉기와
관련해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에게 탄원서를 보냈
었다.
헝가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의 지배를 받았
다. 헝가리의 집권당인 노동자당은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입김에 따라 좌지우지되었다. 헝가리에서 자유는 사라지고
경제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그러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
면서 그의 철권 체제에 신음하던 동구권에선 스탈린을 비판
하는 여론과 격하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국민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헝가리에서는 1956년
10월 23일 공산당 독재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하지
만 스탈린에게서 권력을 이어받은 소련의 흐루시초프는 이
를 좌시하지 않았다. 탱크를 몰고 헝가리를 무력 침공했다.
시민들은 멈추지 않고 13일간이나 '자유를 달라'고 외치면
서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소련의 탱크에 국민의 봉기는 실
패로 끝났다. 소련의 탱크에 무려 2,500명이 목숨을 잃었고
2만 명의 국민이 다쳤다. 살아남은 사람들 상당수가 다른 나
라로 이주했다.
기문은 소련의 부당한 헝가리 침공을 규탄하는 내용
의 글을 전교생 앞에서 읽어 내려갔다.
"존경하는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님! 헝가리 사람
들이 자유를 위해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유엔에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기문이 또박또박 글을 읽자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
박수를 치라고 했다. 다른 아이들에게 헝가리나 자유, 함마
르셸드 같은 것은 재밌는 것이 아니었다. 기문도 어느 정도
는 그랬다. 헝가리 혁명이나 유엔, 유엔 사무총장의 일, 국제
정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는 있었다. 남의 나라에 탱크를 몰고 들어와 사람
을 죽이는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
다. 헝가리의 사정이 일제강점기의 우리 사정과 같다는 생각
도 들었다. 옳은 것을 위해 외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대로
행동한 것이었다. 동네 골목을 평정하는 일에나 관심 가져야
할 초등학생으로선 일종의 '오버' 일 수도 잇다.
재미있게도 이 인연은 대단히 길게 이어졌다. 정확히
50년 뒤 헝가리 정부로부터 '헝가리 자유의 메달' 을 받게 된
것이다.
2006년 가을 그가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되면서 수락
연설을 통해 바로 이 일화를 소개했고, 헝가리 정부는 이 오
래된 일화를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한 초등학생의 작은
행동이 50년 뒤에 훈장이 돼서 돌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ㅡ신웅진《바보처럼공부하고 천재처럼꿈꿔라》중에서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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