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의향기 2012. 7. 9. 15:47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를 위해 나는 다람살라에 있

             는 접견실에 일찌감치 도착해 있었다.  제법 넓은 접            

             견실 안에는 인도풍의 큰 팔걸이 의자와 안락 의자들

이 자연스럽게 놓여 있고, 자연광과 인공 조명이 편안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자주색 부겐빌리아 줄기와 베란다 밖의 무성한 초

록 식물들에 일부 걸러진 한낮의 밝은 햇살이 커다란 창으로 쏟아

져 들어와 방안을 적셨다.  타라 여신(티베트 인들이 좋아하는 자비로

운 여성 붓다)의 각기 다른 특성을 담은 여덟 개의 화려한 티베트

그림이 천장 근처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방의 분위기와 일치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내 눈길을 사

로잡았다.  출입문 근처 창턱에 마치 나중에 생각나서 갖다 둔 것

처럼 워싱턴 D.C. 미의회 의사당을 본딴 수정으로 된 모형 조각상

이 놓여 있었다.  높이가 50센티미터 정도 되는 그 조각상은 매우

묵직해 보였다.  나는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조

각상 아래쪽에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그 조각상은 미 하원의원

톰 랜토스가 달라이 라마에게 수여한, '제1회 라울 월렌베리 의회

인권상' 이었다.

  죽음의 나치 수용소에서 수천 명의 유태인들의 목숨을 구한 스

웨덴 외교관의 이름을 딴 그 상은 1989년 7월 21일에 수여되었

다.  그로부터 석 달도 채 지나지 않은 10월 5일, 노르웨이의 노벨

상 위원회는 오슬로에서 달라이 라마에게 노벨 평화상을 수여한

다고 발표했다.  그들은 달라이 라마의 폭력에의 끊임없는 저항과,

'티베트 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기 위한 인내와 상

호 존중에 바탕을 둔 평화적인 해결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고 밝

혔다.

  당시 54세이던 달라이 라마는 단독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최초의 동양인이었다.  노벨상 위원회 의장인 에질 아르빅을 달라

이 라마의 수상을 발표하면서, 비폭력이라는 방식이 지난 30년

동안 티베트의 독립을 성취하는 데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인정했

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다른 해결 방식은 없다고 믿는다고 말

했다.  그는 비폭력에 대한 의견을 이렇게 밝혔다.

  "물론 그것이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계를 보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

까? 폭력이나 군사적인 힘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평

화적인 길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달라이 라마

가 선정된 것입니다.  그는 평화의 철학을 가장 분명하고 훌륭하게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라이 라마가 가진 평화의 철학 중심에는 용서가 자리잡고 있

다.  30년 전 달라이 라마를 처음 만났을때, 그는 중국인들이 티

베트 인들에게 한 일들을 무조건적으로 용서한다고 내게 말했었

다.그때 나는 깜짝 놀랐었다.  그래서 나는 이번 대화를 통해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