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목련꽃이 필 때면/ 은미희

해탈의향기 2013. 5. 4. 04:07

                                                                                                                                          

                                                                                                                                                 

 

 

 

 

                                                             목련꽃이 필 때면

 

                                                                                                        은미희

 

 

  목련꽃의 계절이 돌아왔다.  한 며칠 환한 빛으로 피어났다 뚝뚝 낱장으로 떨어져 내리는 목련꽃이 필 무렵이면 나는 언제나 한 남자의 등이 생각난다.  작은 방 창문에 바투 의자를 가져다 놓고 화단에 핀 목련꽃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사람, 그는 바로 내 아버지였다.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에 철심을 박은 데다 거푸 찾아온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했던 아버지는 퇴직 이후 자신의 몸을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한사코 밖으로 나가기를 마다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퇴직하기 전까지만 해도 가족을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세상 밖으로 나가 일했다.  한 시골 중학교 교장으로 있던 아버지는 출근 시각을 맞추기 위해 새벽 미명이 밝기도 전에 절룩이며 사위가 고요한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다들 곤히 자느라 아버지의 새벽길을 배웅하는 이 없었고, 아버지는 그렇게 가족들이 깰세라 소리를 줄인 채 살그머니 아파트를 나갔다.  한겨울, 어쩌다 아버지의 기척에 일어나 보면 아버지가 밟고 지나간 흔적이 숫눈길에 길게 났다.  그 희디흰 눈밭에 난 발자국은 달랑 아버지 것, 하나였다.  아버지는 고단했을 그 길을 한 번도 안 한다, 못한다, 게정(불평)을 부리지 않았고, 우리에게 서운타, 못됐다, 타박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그 일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한평생을 살았다.  하긴 아버지에게 다른 길은 없었다.  아버지는 지지리 가난했던 집의 장남이자 오 남매의 가장으로 오롯이 가족을 위해 자신을 내놓아야 했다.  그렇게 그리고 싶었던 그림도 욕심껏 그리지 못한 채 늘 가족 부양이라는 의무와 책임에 자신과 꿈을 버리며 살아야 했다.  그런 아버지는 그림에 대한 열망을 주체하지 못한 채 자주 폭음했다.  가족들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술만 마시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아버지를 외면했고 겉돌며 미워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행여 자리를 같이할라치면 눈 흘기며 돌아앉기 바빴고, 자리를 피해 버렸다.  그러고는 이런저런 이유로 결혼한 오빠 집으로 도망갔다.  한데 봄볕이 유난히 눈부시던 날, 아버지는 창문 가까이 의자를 놓고 오빠 집에 간 어머니를 기다리다 혼잣말처럼 말했다.

  "목련이 피었구나."

  정말, 창밖에는 목련꽃이 흰빛으로 흐르러졌다.  목련이 피었다는 말이 이상할 리 없지만 아버지 입에서 나온 말이어서 생소했고 생뚱맞았다.  아버지가 목련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손대면 검은색으로 물크러지는 저 순결한 꽃을 좋아하다니.  목련과 아버지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고, 편견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무슨 꽃을 좋아하는지, 무얼 좋아하는지, 하나도 알지 못했다.  아니, 나뿐이 아니었다.  가족 누구도 아버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혼자였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새벽에 나갔다 저녁에 돌아와 고단한 몸을 누였다.  나와 가족들은 아버지의 노고로 따뜻한 잠자리와 기름진 음식과 안락함을 제공 받으며 그렇게, 그렇게 성장했다.  마치 새끼 거미가 어미 살을 파먹듯 우리는 아버지의 영혼과 육신과 시간과 꿈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자랐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 새벽,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다 그만 넘어졌다.  그 바람에 대퇴부 뼈가 가루처럼 부서졌고, 그뼛조각 하나가 동맥을 눌러 혈관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수술받아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수술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가 영원히 우리 곁에 있을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나는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난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용돈도 건네지 않았고, 곰살궂게 이야기 나누지 못했고, 손 한 번 잡아 보지 못했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가 무얼 좋아했는지 모른다.  이 쓸쓸하고도 뒤늦은 각성이 참으로 나를 슬프고 부끄럽게 한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아버지는 내 곁에 없는 것을.  올해도 어김없이 내 마음에는 꽃보다 먼저 알싸한 슬픔이 돋는다.  

  "아버지, 머지않아 목련꽃이 환하게 피겠지요.  당신 때문에 오늘의 내가 존재합니다.  사랑합니다." 

 

  ㅡ 월간《좋은 생각》중에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