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왕좌는 비었고 승기를 잡은 아쇼카는 무려 99명의 형제를 도륙했다. 왕자들을 따르던 신하와 궁녀들도 남김없이 처형했다. 그 피바다 속에서 이미 유복자가 된 막내 동생 단 한 명만이 살아남아 아쇼카의 칼을 피해 출가했다. 그렇게 왕좌에 오른 아쇼카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복전쟁을 펼쳤고 마침내 인도 통일이라는 대업을 달성했다.
그러나 수십만의 생명이 그 과정에서 사라져갔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 위에 제국이 우뚝 섰지만 고통과 회한이 아쇼카를 엄습했다. 그때 손을 내민 이가 있었다. 바로 유일하게 살아남아 출가했던 막내 동생이었다. 그의 제도로 아쇼카는 불교에 귀의했고 자신이 뿌린 피를 닦아내려는 듯 인도 전역에 법등을 밝혔다. 바위마다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가르침을 새겼다. 그리고 부처님 입멸 후 사리를 봉안했던 열덟 개의 스투파 중 8번 스투파를 해체, 진신사리로 인도 전역에 8만여 기의 스투파를 세웠다. 산치스투파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산치스투파는 그 중에서도 특별하다. 아쇼카는 젊은 시절 비데샤 지방의 데비라는 여인을 사랑했다. 왕이 되기 전이었고 둘 사이에서는 남매가 태어났다. 그러나 아쇼카는 전장으로 떠나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되었다. 수십 년이 흘렀고 젊은 시절 사랑했던 여인을 까맣게 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쇼카가 데비에게 남겨주었던 신표를 들고 청년이 된 아들이 찾아왔다. 옛 사랑을 떠올린 아쇼카는 비데샤로 달려갔지만 이미 데비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부처님 곁에 묻히고 싶어했다’는 데비의 소원에 따라 그녀의 고향 비데샤에서 가까운 언덕 위에 진신사리를 봉안한 스투파를 조성했다. 그리고 다시 찾은 남매는 출가하여 남방으로 법등을 전했다. 바로 스리랑카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마힌다 스님과 보리수를 전한 상가미타 스님이었다. 산치스투파에는 ‘사랑의 탑’이라는 별칭이 있다. 이 탑이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탑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이유도 바로 이런 애틋한 전설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산치스투파가 조성 당시부터 지금과 같은 규모는 아니었다. 지금보다 훨씬 작은 스투파였으나 이후 스투파를 크게 증축하거나 새로운 스투파를 세워 지금과 같은 큰 규모의 유적군이 되었다.
말끔하게 정리된 잔디언덕 위에 넉넉히 둥근 모습으로 앉아있는 스투파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산치에는 모두 8개의 스투파가 있었으나 현재는 3개가 남아있다. 그 외에 40여 개가 넘는 승원과 석주, 탑문들이 산치 유적군 안에 흩어져있다.
그레이트스투파로 불리는 1번 대탑이 아쇼카왕이 데비를 위해 세운 진신사리탑이다. 아쇼카왕이 조성했던 원래의 스투파를 후대에 크게 확장해 지금은 높이 16m, 직경 37m에 달하는 규모가 되었다. 발우를 뒤집어 놓은 모양의 둥근 스투파 주변에 난간을 두르고 토라나라 불리는 4개의 석조 기둥 관문을 세웠다. 석조관문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과 생애가 아름답고 섬세한 부조로 조각돼 있다.
특히 가장 아름다운 토라나로 손꼽히는 북문에는 부처님께 꿀을 공양하는 원숭이, 스라바스티에서 부처님이 보이신 신변의 기적 등이 정교하고 조각돼 있다. 그 사이사이에는 코끼리와 요정 압살라, 망고나무 등이 표현돼 있다. 흥미로운 점은 부처님의 모습이 보리수나 발자국 등 상징적인 모습으로 표현돼 있다는 점이다. 예술에 문외한이라도 이 조각들이 불교미술사에 길이 남을 걸작임이 느껴진다. 동문에는 마야부인의 태몽, 태자의 출가, 열반 등 부처님의 생애가 펼쳐진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남문에는 등을 맞댄 사자 4마리가 석주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 남아있는데 인도 지폐에도 등장할 만큼 인도를 대표하는 문양 가운데 하나다. 서문에서도 자타카에 등장하는 부처님 전생 이야기들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하나의 조각들이 전해주는 부처님 이야기를 찾아 읽다보면 이 스투파를 조성하는데 얼마나 많은 정성과 신심이 모아졌는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