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처님 공부

진정한 보시란 무엇인가?/ 황전스님

해탈의향기 2013. 12. 5. 19:10

 

 

 

 

 

 

 

                                   진정한 보시란 무엇인가?/ 황전스님 

 

 

불교 수행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육바라밀(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수행 중에서 맨 처음에 하는 행위가 보시이다.  어째서 제일 먼저 보시를 하라고 했을까?

 

 

황전이 생각으로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불법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그 어려운 불법을 만나려면 어떤 바탕이 있어야 하는데 그 바탕을 형성하는 것이 바로 보시(福)가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불교 수행은 전생이든 이생이든 자신이 지어놓은 튼튼한 복(福)의 반석 위에서 해야지 수행다운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수행자가 수행이 잘 안되는 것은 지어 놓은 복의 바탕이 없기 때문에 수행이 잘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눈 밝은 종사가 먼저 복을 짓는 행위가 우선이라면서 보시를 제일 먼저 써 놓은 것이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보시를 하는 행위가 수행 중에서 가장 어려운 수행이다.  만약 어떤 신심 있는 사람이 어느 절에다가 불사를 하라고 보시를 했는데, 그 절 주지스님이 그 보시금을 불사에 쓰지 않고 개인적으로 엉뚱한 곳에 써버리면 그 죄를 누가 받겠는가?  보시하는 사람이야 보시만 하면 그만이지 누가 어떻게 쓰던 무슨 상관이냐 하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가 않다.  보시자는 주지스님이 엉뚱한 곳에 쓰도록 원인 제공을 한 것이다.  보시금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어찌 엉뚱한 곳에 쓸 생각을 했겠는가?  수행이 깊어지지 않으면 견물생심(見物生心)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시를 살펴보면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배고픈 걸인이 있기에 그냥 갈 수가 없어서 돈을 조금 보시를 했다.  그 걸인은 전생에 지은 인과로 해서 이생에 걸인이란 과보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 걸인은 춥고 배고프고, 남에게 멸시를 당하고 차가운 땅을 침대 삼고 하늘을 이불 삼아서 잠을 자는 고통을 겪어야만이 다음 생에는 걸인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보시자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불쌍하다는 생각으로 보시를 한다면 그 걸인은 그 돈 몇 푼에 맛을 들여 어떻게 하든지 많은 동냥을 해서 편하게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보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러다 보면 이 걸인은 세세생생 걸인의 팔자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옛 어른들의 말씀에, 세상에 태어날 때 누구든지 자신의 복과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다.  걸인에게 아무도 보시를 해주지 않는다면 걸인은 스스로 살기 위해서 일자리를 찾거나 하다못해 길거리에서 고물을 주어다 팔아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걸인의 팔자를 벗어나는 방법이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다.  어째서 보시자는 걸인의 팔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인가?

 

 

언젠가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어떤 사람들이 나와서 자신들이 한 달 고생해서 번 돈으로 내놓으면서 하는 말이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써 주세요

 

 

도대체 자신들 보다 더 못한 사람들이 누구란 말인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가? 세상에 자기자신보다 더 못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알기전에는, 보시를 받은 사람에게 물어보라.  언제 주라고 한 적이 있는가?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서 무엇을 주면서 영문도 모르고 웃으라고 하니까 웃어주고 영문도 모르면서 받아쓰는 것뿐이다.  그리고 다음에 또 안주나?  하는 의타심을 갖게 만들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보시를 전혀 하지 말라는 말인가?  보시를 해도 문제요, 하지 않으면 복을 지을 수가 없으니 더 큰 문제가 아닌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수행 중에서 보시하는 수행이 가장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진정한 보시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보시를 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보시를 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보시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보시를 하는 것이다.  그 안목을 갖기 위한 수행이 어렵다는 것이다.

 

 

부처님과 그 수행자들에게 기원정사를 지어준 것은 보시를 받을 자격을 갖춘 분에게 보시를 한, 그 안목을 가진자라고 보면 될것이다.

 

 

황전이가 이러한 글을 쓰는 목적은 보시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많은 보시를 하되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이 함께 기쁘고 즐거운 보시를 찾아서 하라 그 말이다.

 

 

경전에는 무주상 보시를 으뜸으로 치고 있는데 이 무주상 보시는 높은 보살의 지극한 수행의 경지이다.  인간은 의식이 있는 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황전이 주변에도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보살님이 있다.  그리고 무엇이든 주고 나면 그만 잊어버리고 또 주려고 한다.  그 주고자 하는 마음이 끝이 없어서 황전이가 어느 날 그 보살의 사주를 다른 사람에게 물어본 일이 있었다.  그 보살의 끝없이 주고자 하는 보시는 팔자 소관이었다.  그 보살은 이생에 무엇이든 막 퍼주러 온 사람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든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주상 보시인가?

 

 

이 보살은 아마 전생에 남의 것만 얻어먹고 살았기 때문에 이생에 그 빚을 갚기 위해서 막 퍼주는 것이다.  전생에 무엇을 했던지 지금 이 순간 그러나 남에게 베풀고 사는 삶이란 참으로 좋은 삶이다.

또한 다른 관점에서 보면 관세음보살님의 분신으로 와서 많은 보시를 하는 보살님도 계신다.  그러한 분들은 물질도 물질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감싸 준다.

 

 

진정한 보시

 

 

진정한 보시란

자신이 주어진 그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

 

아무도 자신의 역할을

대신 해 줄 수가 없다.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

 

참으로 충실한 그 역할이

서로가 서로에게 진정 필요한

그 무엇이 되는 것.

 

그 무엇이 진정한 보시인 것이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무주상 보시인 것을...

 

 

출처: 오도선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