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의향기 2012. 8. 27. 10:07

 

 

에 대부분 가족을 잃었고, 심한 동상에 걸린 이들도 적지 않았다.

등에 지고 있는 옷가지 몇 벌과 황급히 챙긴 귀중품 몇 가지만을

들고 북인도 사르나트의 뜨거운 평원에 도착한 그들은 생계를 꾸

려 나가기 위해 그곳에다 임시 천막을 쳤다.

  그 당시 24세였던 달라이 라마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그 자리

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라싸에서 날이 갈수록 가혹해지던

중국인들의 탄압, 히말라야를 넘어 탈출할 때의 비참함, 그리고

마침내 난민 신세가 되었다는 자각 등 폭풍과도 같은 지난 몇 달

동안 겪었던 모든 일들이 그 순간 모두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그

때까지 가둬 두었던 온갖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가

그토록 슬프게 흐느껴 운 것은 그때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가 처음로 달라이 라마를 만난 것은 1972년 3월의 일이었

다. 그때 내 자신이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나

는 그 당시 중국과 티베트의 관계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이

한 가지만은 알고 있었다.  중국인들이 티베트를 점령하면서 너무

도 많은 티베트 인들을 죽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티베트 지도

자가 내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몹시 불안했다.  이쨌든 나는 그가

10여 년 전 자신의 나라를 탈출한 이후 그와 마주 앉게 된 최초의

중국인이었다.

  최근 다람살라에서 가진 한 대화에서 내가 달라이라마에게 말

했다.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1972년 내가 처음으로 당신을 만났을

때 내 마음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당신이 중국인을 미워하

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고 말했습니다.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당

신의 나라를 잃은 지 겨우 13년밖에 안 된 시점이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관대함에 너무도 놀랐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대답했다.

  "그것이 불교도의 수행입니다.  나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 대다

수의 티베트 수행자들이 미슷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용서와

자비는 수행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지금은 중국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곳 인도와 대만에서 내가 한 강연들을 통해 당신은 중국인

에 대한 내 마음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대만에 갔을 때 나는 종

교인이든 일반 시민이든, 아니면 공무원이든, 심지어 경호원들에

게까지도 매우 친근감을 느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내가 어린 시

절을 티베트 동쪽에서 보내면서 서툴게나마 중국어를 할 줄 알

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중국인이 내게 순수

한 우정을 보이면 나는 자동적으로 반응을 보입니다.  하지만 어느

나라에 가서 누구를 만나든, 그가 아프리카 흑인이든, 인도인이

든, 중국인이든, 유럽인이든 내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겁니다."

  나는 표현을 하진 않았지만, 그의 얘기가 전적으로 옳다고는 생

각하지 않았다.  나는 달라이 라마가 중국인들, 특히 중국 본토에

사는 사람들과 접촉하기 위해 얼마나 각별히 노력해 왔는가를 잘

안다.  그는 그 만남들을 위해 많은 시간을 쏟았고, 그때마다 중국

인들은 그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다.  나는 그가 워싱턴 D.C에서

중국의 유명한 작가 윙 리쇼을 만난 일을 기억한다.  윙 리숑은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