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 서
"하지만 물론 존재의 무상함과 공의 진리는 매우 강력하게 깨
닫고 있지요. 매우 유용하게 쓰고 있기도 하구요. 특히 공의 개념
에 대해서는요."
김용옥은 작은 노트를 꺼내 받아적기 시작했다. 달라이 라마는
그 한국인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공이란 상호 의존 또는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나가르주나는 2세기경의 인도인 스승으로, 그의 가르침은 티베
트 불교의 토대가 되었다.
달라이 라마의 말이 이어졌다.
"공은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은 텅 빈 것
이 아니라 가득 차 있습니다. 공의 진리를 깨닫는 것, 공에 대한
앎을 터득하는 것······. 나는 내 자신이 공에 대해 약간의 지적인
이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은 ㅡ 당신은 그것을 상호 의존
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ㅡ 우리의 시각을 넓혀 줍니다. 세상
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시
각을. 그것은 실제로 넓어집니다. 전체적인 시각을 갖는 데 그것
은 큰 도움이 됩니다."
달라이 라마는 잠시 한국인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통역 담당 승
려인 락도르에게 티베트 어로 뭐라고 말했다. 그러자 달라이 라마
옆의 바닥에 앉아 있던 락도르가 그 학자에게 물었다.
"커피? 아니면 차를 드시겠습니까?"
그 학자가 말했다.
"아무거나. 어······ 차로 주십시오."
달라이 라마가 즉석에서 고민을 덜어 주었다.
"커피를 드려야 할 것 같은데."
그러자 김용옥은 얼른 생각을 바꾸었다.
"아, 그럼 커피로 하죠."
달라이 라마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하버드가 한국인 한 사람을 미국인으로 만들어 버렸군요."
달라이 라마의 농담에 그 한국인은 다시 차를 달라고 정정했다.
그러면서 말했다.
"맞습니다. 난 너무 미국식으로 변하긴 했지요. 하지만 비록 내
가 외국의 대학에서 교육을 받긴 했지만, 한국에선 나를 누구보다
도 전통적인 사람으로 여깁니다."
달라이 라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아주 좋습니다. 아주 좋은 일이에요."
김용옥이 자신의 윤기 나는 검은색 두루마기를 두드려 보이며
말했다.
"이 옷만 해도 내 손으로 직접 디자인한 것입니다. 평소에도 나
는 전통적인 복장만 입습니다. 서양 스타일 옷은 절대로 입지 않
습니다."
김용옥은 두 명의 사진사와 한 명의 비서를 인터뷰에 대동하고
나타났다. 그중 한 젊은 사진사는 측면에서 부지런히 셔터를 누르
고 있었다. 이때 김용옥이 달라이 라마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 사
진사에게 뭐라고 간단히 말하자, 그 청년은 얼른 달라이 라마 뒤
편으로 이동해 자신의 고용주에게 더 잘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위치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