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의 역사
2. 삼국과 통일신라시대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로 내려와 쌀을 중심으로 한 곡물 농업이 크게 확대
되면서 떡은 크게 발달하였다. 삼국시대의 고분에서 시루가 어김없이 출토되
고, 또 고구려의 안약 3호분 벽화나 양수리 고분 벽화 등에 주방의 모습과
함께 시루가 그려져 있음은 이러한 사실을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 시대의 있어서는 떡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도 적지 않다. 예컨대,《삼
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 유리왕 원년(298)조 〉에는 남해왕(南解王)이 돌
아가자 유리(儒理)와 탈해(脫解)가 서로 왕위를 사양했다는 기록에 이런 이야
기가 전한다. 탈해가 유리에게 말하기를 "왕위는 용렬한 사람이 감당할 바
못되며,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가 많다고 하니 시험을 하여
결졍하자."고 제의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떡을 깨물어 본 결과, 유
리의 치아 수가 많아 유리가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이다. 여기서 말하는 떡이
어떤 종류의 떡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깨물어서 잇자국이 선명하
게 날 정도라면 곡물을 쪄 다시 쳐서 만든 흰떡이나 인절미 및 절편 등을 생
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같은 책〈열전(列傳) 백결선생(白結先生)조 〉에는, "백결선생은 신라 자비
왕대(慈悲王代, 458-479) 사람으로 경주에 살았다."는 말과 함께 세모(歲暮)가
되어 이웃에서 떡방아 소리가 나, 부인이 가난하여 떡을 치지 못함을 안타까
워하자 거문고로 떡방아 소리를 내어 부인을 위로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
서 말하는 떡도 떡메로 쳐서 만든 흰떡. 절편. 인절미 등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록은 이 시대에 이미 연말에 떡을 하는 절식(節食) 풍속이 일반
화되어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삼국유사 (三國遺事)》 〈효소왕대(孝昭王代, 692-702) 죽지랑
(竹旨郞)조 〉에는 "공사(公事)로 갔더니 응당 대접하리라 하고 설병(舌餠)한 합
과 술 한 병을 가지고 ···."라고 기록하였는데, 여기서 '설병'이란 떡이 있었음
을 알려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떡이 구체적으로 어떤 떡을 의미
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설병(舌餠)의 '설(舌)'자가 '혀'를 의미하
므로 혀의 모양처럼 생긴 인절미나 절편을 생각해 볼 수 있고, 또 그 음(音)
으로 미루어 설병(雪餠) 곧 설기떡을 생각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이 밖에 《삼국유사 》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주관하여 세시마다 술. 감주. 떡. 밥. 차. 과실 등 여러 가지를 갖추고 제
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떡이 제향 음식의 하나였음
을 알려 주고 있다.
한편, 우리의 상고시대 음식을 전수해 간 것으로 알려진 일본의 정창원문
서(正倉院文書)에는 대두병(大豆餠, 콩시루떡). 소두병(小豆餠, 팥시루떡). 이식
. 전병(煎餠)등의 이름이 보인다. 따라서, 고려시대 이전에 이미 치는 떡(인
절미.절편.흰떡), 찌는 떡(백설기.콩시루떡.팥시루떡)등과 함께 증편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이식, 기름에 지져 만드는 전병 등이 만들어졌으리라는 추정을
가능케 하고 있다.
ㅡ 강인희《한국의 떡과 과줄 》중에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