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 서
십만 명의 순례자들이 50개국에서 온 2천 명의 서양인들과 함께
임시로 꾸민 행사장에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자리에 앉은 달라이 라마는 승복 안쪽에서 주섬주섬 종이 한 장
을 꺼냈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는 언제나 원고 없이
즉석에서 연설을 했었다. 나는 무대 아래에 있는 군중들을 보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나는 내 시선 한 구석에서 가늘고 긴 흰 새 같은 어떤
것이 무대 앞쪽에 앉아 있는 수도승들의 머리 위 하늘을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한 수도승이 가부좌를 하고 앉은 채로 자신의 바랑
에서 의식에 쓰는 흰색 스카프 카따를 꺼냈다. 그는 그것을 공처
럼 뭉쳐 군중들의 머리 위로 던졌다. 그것은 바람을 타고 우아하
게 공중을 날아갔다. 긴 염소 수염을 한 수도승이 그것을 중간에
잡아서 더 앞쪽으로 던졌다. 그러자 순식간에, 마치 보이지 않는
시작 사인을 받은 것처럼, 수백 개의 부드러운 흰색 스카프들이
무수히 많은 연들이 날듯 붉은색 바다 위에 너울거리는 흰색 그물
망을 만들며 날아다녔다. 무대 앞으로 나아가 병든 티베트 지도자
에게 직접 스카프를 건넬 수 없었기 때문에 수도승들과 순례자들
은 차선책을 택한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등을 구부리고 의자에 앉아 이 장면을 바라보았
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는 두세 차례
애써 숨을 들이쉬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인
순간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자신을 염려해 주는 것에 그가
깊이 감명 받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 순간을 언제까지나
기억할 것이다. 그곳에는 수십만 군중이 가득 찼지만, 기침 소리
하나 침묵을 깨뜨리지 않았다. 다만 흰 스카프 연들만이 펄럭이며
공중을 날아다닐 뿐이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굵은 저음의 목소
리는 여전했지만, 어떤 웅장함 같은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병이
그에게서 생명력을 너무 많이 빼앗아간 것이다. 통역을 맡은 락도
르는 무대 한쪽 구석에 가부좌를 하고서 작은 마이크를 앞에 놓고
앉아 있었다. 달라이 라마가 군중들에게 말하기 시작하자 락도르
는 마이크에 대고 부드럽게 영어로 말했다. 서양인들은 귀에 꽂은
FM 라디오 수신기를 통해 그의 통역을 들을 수가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나는 많이 아팠습니다. 그전에 건강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내게 좀더 휴식을 취하고 너무 과로하지 말라고 충
고했습니다. 나는 그들의 말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요.
나는 너무 건강에 소홀하고, 고집을 부렸던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청중에게 독수리봉 순례와 산정상까지 올라갔던
힘든 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파트나까지 차를 타고 가던 도중에
겪은 심한 복통에 대해서도 말했다.
"나는 이제 다 나았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몹시 피로합니다.
아무래도 나는 칼라차크라 예비 강론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귀에 꽂고 있는 수신기 속으로 약간의 훌쩍거림이 들려왔
다. 나는 락도르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의 얼
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칼라차크라 입문 의식도 시간을 어느 정도 단축할 수는 있겠
지만, 그것을 준비하려면 날마다 적어도 대여섯 시간이 걸립니다.
현재의 내 건강 상태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