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 서
"당신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어쨌거나 예기치 않은 뭔가가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납치 사건이
그것이지요. 만일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이곳에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나와의 이 모든 관계, 티베트 인들과의
관계들도 발전시킬 수 없었겠지요. 따라서 나는 우리의 삶에서 일
어나는 모든 일에 다 원인과 조건들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불교적
인 관점에서 보면 많은 전생들에 카르마적인 연결이 있을지도 모
릅니다. 어쩌면 그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가깝게
느끼는 이유일 수도 있지요."
그렇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납치 사건. 1971년, 나는 대학을
졸업한 뒤 위트레흐트(네덜란드의 한 도시)에서 폭스바겐 캠핑카를
구해, 네덜란드에서 인도까지 가는 육로 여행에 나섰다. 터키와
이란을 가로지른 다음, 나는 반년을 아프가니스탄에서 보냈다. 당
시 아프가니스탄은 기존 사회로부터 이탈한 젊은이들과 모험가가
되기를 꿈꾸는 이들의 피난처였다.
그 여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나는 두 명의 젊은 여자-뉴욕에
서 온 셰릴과 뮌헨에서 온 리타-와 함께 아프가니스탄 남자 세
명에게 납치를 당했다. 그들은 권총 한 정을 휘두르며 우리를 위
협해 심하게 녹슨 차에 태운 뒤, 힌두쿠시 산맥 고지대의 작은 마
을로 데려갔다. 며칠 동안 붙잡혀 있던 우리는 그들의 차가 급커
브에서 미끄러져 산비탈에 부딪친 틈을 타 가까스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곧이어 셰릴과 나는 인도 여행을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다람살라에서 망명 중인 달라이 라마에게 보내는 소개 편지를 지
니고 있었다. 우리는 곧바로 그림 같은 티베트 정착촌을 향해 출
발했다. 다람살라에 도착하고 며칠 지나서 접견 허락이 떨어졌다.
1972년 3월의 서늘하고 구름이 낮게 깔린 어느 봄날, 나는 모든
티베트 인들의 영적 지도자이자, 동시에 티베트 인들에게 현실 세
계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처음으로 만났다.
운명,카르마. 무엇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렇다. 달라이 라마의
말이 옳았다. 만일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 사건을 겪지 않았더라
면 틀림없이 나는 달라이 라마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와 함
깨 책을 쓰고, 그가 가진 카리스마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건 둘째
치고라도.
달라이 라마는 자신이 가진, 사람을 끌어당기는 커다란 힘에 대
한 내 질문에 여전히 심사숙고하면서 말을 이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내 웃음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게 어떤
종류의 웃음인지, 어떤 종류의 미소인지 나는 모릅니다."
내가 말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웃음에 대해 한마디씩 하지요. 당신이 가진
장난스러움에 대해서도요. 당신은 70세가 다 됐지만, 여전히 장
난을 좋아하고, 스스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말했다.
"우선, 티베트 사람들은 대개 쾌활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많
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웃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 가족들도 마찬가집니다. 걀로 쏜둡 (달라이 라마의 둘째형) 만 제
외하고는 가족 모두가 그렇죠. 큰형 노르부는 언제나 장난칠 준비
가 되어 있고, 늘 짓궃게 농담을 합니다. 세상을 떠난 내 바로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