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의향기 2012. 6. 26. 17:18

 

 

  "당신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어쨌거나 예기치 않은 뭔가가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납치 사건이

그것이지요.  만일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당신은 이곳에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나와의 이 모든 관계, 티베트 인들과의

관계들도 발전시킬 수 없었겠지요.  따라서 나는 우리의 삶에서 일

어나는 모든 일에 다 원인과 조건들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불교적

인 관점에서 보면 많은 전생들에 카르마적인 연결이 있을지도 모

릅니다.  어쩌면 그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가깝게

느끼는 이유일 수도 있지요."

  그렇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납치 사건. 1971년, 나는 대학을

졸업한 뒤 위트레흐트(네덜란드의 한 도시)에서 폭스바겐 캠핑카를

구해, 네덜란드에서 인도까지 가는 육로 여행에 나섰다.  터키와

이란을 가로지른 다음, 나는 반년을 아프가니스탄에서 보냈다. 당

시 아프가니스탄은 기존 사회로부터 이탈한 젊은이들과 모험가가

되기를 꿈꾸는 이들의 피난처였다.

  그 여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나는 두 명의 젊은 여자-뉴욕에

서 온 셰릴과 뮌헨에서 온 리타-와 함께 아프가니스탄 남자 세

명에게 납치를 당했다.  그들은 권총 한 정을 휘두르며 우리를 위

협해 심하게 녹슨 차에 태운 뒤, 힌두쿠시 산맥 고지대의 작은 마

을로 데려갔다.  며칠 동안 붙잡혀 있던 우리는 그들의 차가 급커

브에서 미끄러져 산비탈에 부딪친 틈을 타 가까스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곧이어 셰릴과 나는 인도 여행을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다람살라에서 망명 중인 달라이 라마에게 보내는 소개 편지를 지

니고 있었다.  우리는 곧바로 그림 같은 티베트 정착촌을 향해 출

발했다.  다람살라에 도착하고 며칠 지나서 접견 허락이 떨어졌다.

1972년 3월의 서늘하고 구름이 낮게 깔린 어느 봄날, 나는 모든

티베트 인들의 영적 지도자이자, 동시에 티베트 인들에게 현실 세

계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처음으로 만났다.

  운명,카르마.  무엇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렇다.  달라이 라마의

말이 옳았다.  만일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 사건을 겪지 않았더라

면 틀림없이 나는 달라이 라마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와 함

깨 책을 쓰고, 그가 가진 카리스마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건 둘째

치고라도.

  달라이 라마는 자신이 가진, 사람을 끌어당기는 커다란 힘에 대

한 내 질문에 여전히 심사숙고하면서 말을 이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내 웃음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게 어떤

종류의 웃음인지, 어떤 종류의 미소인지 나는 모릅니다."

  내가 말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웃음에 대해 한마디씩 하지요.  당신이 가진

장난스러움에 대해서도요.  당신은 70세가 다 됐지만, 여전히 장

난을 좋아하고, 스스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말했다.

  "우선, 티베트 사람들은 대개 쾌활한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많

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웃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 가족들도 마찬가집니다.  걀로 쏜둡 (달라이 라마의 둘째형) 만 제

외하고는 가족 모두가 그렇죠. 큰형 노르부는 언제나 장난칠 준비

가 되어 있고, 늘 짓궃게 농담을 합니다.  세상을 떠난 내 바로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