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를 피해서 뭣하리!
동산洞山 선사에게 어떤 납자가 물었다.
"더위가 닥쳐오니 어떻게 피하리까?"
"무엇 때문에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느냐?"
"어디가 더위 없는 곳입니까?"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덥다. 지구온난화 덕분인지 여름
을 맞는 체감온도는 해마다 더 뜨거워지는 것 같다. 하긴
본래부터 '삼복더위' 라고 했으니 더울 때가 되어 더운 것
인데 중생들은 이를 무슨 새로운 사건이라도 생긴 것처럼
해마다 별스러운 일로 받아들인다. '무더위' 라는 낮시간
대에 국한된 더위의 고전적 표현은 이제 '더워서 잠 못 이
루는 밤' 이라는 "열대야熱帶夜' 로 이어졌다. 여름을 앞둔
일기예보의 으름장은 에어컨 수요를 더욱 부채질한다. 하
지만 실내를 시원하게 만든 과보로 바깥 기온을 더 뜨겁
게 만든다는 사실은 잊고 산다. 어쨌거나 더 큰일은 더운
것보다는 더워야 할 때 제대로 덥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
건 재앙이다.
여름을 맞이하는 마음가짐에도 두 종류가 있다. 더위를
피하고자 하는 피서파避署派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이열
치열以熱治熱'을 외치는 영서파(迎署派 더위에 맞서고자 하는 부류)
도 있기 마련이다. 사실 선종 입장은 피서파가 아니라 영
서파를 추구한다. 무정물인 연꽃은 더위를 즐기는 모양새
다. 한창 더울 때 한반도 곳곳에서 연꽃축제가 열리기 때
문이다. 더위를 이겨내는 당당한 자태는 보는 이로 하여
금 더위조차 잊게 한다. 굳이 분류하면 연꽃도 영서파에
속한다 하겠다.
예전에 추운 정월 대보름날 미리 '더위팔기' 를 했다. 아
침 일찍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재빠르게 그 사람의 이름
을 부른 뒤 "내 더위 사가거라" 하고 외치면 끝난다. 그 공
덕으로 그 해는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당해야 한다면 이건 불공평한
'일이다. 모든 거래는 늘 동등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위를
사라' 라는 말을 듣더라도 긍정하지 않고 도리어 '내 더위
먼저 사가시오' 라고 반격하면 오히려 상대방의 더위까지
떠안고 오게 된다. 혹 떼려다가 혹 붙이는 셈이다. 이를
'학(謔 농지거리)'이라고 이름 붙였다.
더위가 없는 곳은 없다. 성경에는 '땅이 있을 동안에 추
위와 더위가 쉬지 않으리라' 하였다. 이슬람의 금욕정진
기간인 '라마단' 은 그 뜻이 '타는 듯한 더위'라고 했다.
더위를 수행으로 극복하자는 뜻이 깔려 있다.
정조대왕의 어록인『일득록日得錄』에는 나름대로 성군다
운 피서법이 나온다.
더위를 물리치는 데 독서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책을 읽으
면 몸이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고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
이 생겨 바깥의 더운 기운(外氣)이 자연히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
독서삼매를 통하여 더위를 잊고자 하는 경지를 유감없
이 보여주고 있다.
어떤 납자가 노숙(老宿)에게 물었다.
"날씨가 더우니 어디로 피해야 합니까?"
"끊는 기름 가마솥으로 피하라."
더 과격한 선어록의 표현을 빌리자면 '더운 날 시원하
고 싶다면 화탕노탄火湯爐炭 속을 향해서 뛰어들라' 라고 했
다. 화탕은 물이 펄펄 끓는 곳이고 노탄은 숯불이 벌겋게
불붙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 말에 대하여 무비 스님은 이렇게 해석했다.
더위를 의식하고 사는 것 자체가 열렬하게 그 무엇인가에
마음을 쓰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일생을 던져도 아깝지 않
은 일에 마음을 쓴다면 그 까짓것 더운 것이 뭐 그렇게 문제될
것이 있겠는가? 열심히 정진하면 더위도 잊는다. 덥다는 것은
제대로 정진하지 않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화탕노
탄의 불처럼 치열하게 정진하라. 더위를 의식한다면 그게 뭐
제대로 된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조당집』5권 「운암」편에는 동산洞山 선사의 말을 인용하
여 이렇게 주석을 붙이고 있다.
"마치 어떤 사람이 화탕노탄 지옥에 들어가도 타거나 데이
지 않아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평상심을 영원히 잃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떤 곳에 있다고 할지라도 영원히 휴식을 얻게 된
다." 그렇게 된다면 이산 연 선사 발원문에서 말하는 "화탕지
옥 끓는 물이 감로수로 변하는" 것이다. 그래도 못 알아듣는
녀석들을 향하여 진정극문(眞淨克文, 1025ㅡ1102)선사는"이 법문
의 뜻을 그래도 모르겠거든 더위 속에서 그냥 여름을 보내라"
라고 비틀어서 질책하고 있다.
이 모든 시시비비에 대하여 목암법충(牧庵法忠, 1084ㅡ1149)
선사는 압권의 일갈을 남겼다.
"더위가 닥치면 어떻게 피하리오?"
"피해서 무엇하리오."
글 / 원철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