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함께 꽃이되네

[스크랩] 천하 사람을 위한 그늘(중앙선데이) / 원철스님

해탈의향기 2013. 5. 27. 13:39

 

 

천하 사람을 위한 그늘

 

원철 스님 munsuam@hanmail.net | 제283호 | 20120812 입력
덥다. 그늘을 찾는다. 처마 끝이 만들어 낸 직선의 지붕 그늘도 좋지만 나무가 만들어 준 원만한 곡선의 그늘은 더 고맙다. 동네 어귀 느티나무처럼 한 그루가 만들어 내는 도도한 그늘은 격이 있고, 소나무 군락처럼 여러 그루가 동시에 만들어 내는 빽빽한 숲 그늘은 깊은 맛이 있다. 한 그루 그늘이 잠시 쉬기 위한 공간이라면, 숲 그늘은 아예 몸과 마음을 내려놓게 만들고 또 모든 걸 잊어버리게 한다. 이즈음은 치유와 명상의 기능까지 떠안았다. 잠깐 구경 삼아 쉬려 왔던 숲 그늘에 반해 그 자리에 완전히 눌러앉은 이들도 더러더러 있기 마련이다. 혹여 유명인사라면 그 숲은 그대로 스토리텔링이 더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가 된다.

 


 

 

제왕운기를 남긴 고려 말의 대학자 이승휴(李承休·1224~1300)는 당시 ‘호모 노마드(homo-nomad·옮겨다니는 사람)’였다. 그래서 ‘동안(動安)거사’라고 불렀다. 안주하는 삶보다는 차라리 움직이는(動) 것을 더 편안히(安) 여긴 까닭이다. 세상에 원칙(道)이 있다고 생각되면 벼슬자리에 나아갔고, 원칙이 무너졌다고 판단되면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굳은 심지는 옳은 것은 옳다고 했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했다. 그 결과는 파직과 좌천으로 인한 이동이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강원도 삼척 천은사(天恩寺)의 소나무 그늘 자리를 만난 이후엔 망설임 없이 그대로 눌러앉았다. 후학들이 위패까지 모셔놓은 숲 속 동안사(動安祠)는 700여 년 이상 누릴 만한 편안한 휴식처였다.

천은사 가는 길에 들렀던 준경묘· 영경묘 인근의 백두대간은 조선왕실의 탯자리답게 일등급 소나무인 황장목(黃腸木)으로 가득했다. 소나무는 ‘왕의 나무’였다. 경복궁 중수와 새 숭례문 복원에는 기꺼이 자기 몸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능참봉은 능 관리와 제사 준비 및 의전담당이라는 고유 업무와 함께 인근 소나무 숲을 돌보는 일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당연히 능을 관리하는 사찰인 천은사 스님들도 같이 힘을 보탰다. 아궁이 불 때던 시절, 넓은 면적의 수만 그루 나무를 지킨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능림(陵林)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찰림인 까닭에 행자들은 새벽마다 ‘담시역사(擔柴力士·나무를 지키는 수호신)’에게 감사의 절을 올린 후 장작불을 지펴 밥물 끓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불볕더위는 무분별한 산림훼손과 이산화탄소의 과다한 배출이 겹친 결과라고 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탄소량을 증가시키는 공범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부채의식의 틈을 비집고 어김없이 ‘녹색성장’ 참여를 독려하는 공익광고가 끼어든다. KTX동대구역 계단을 오를 때마다 “당신은 오늘 나무 8그루를 심었습니다”라는 글귀에 꽂힌다. 서울에서 대구까지 승용차로 올 때보다 기차로 오는 것이 탄소를 그만큼 덜 배출했다는 의미다.

고속도로 톨게이트의 무정차 통과차로에는 “하이패스는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라는 안내문도 지구온난화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어보려는 운전자를 위로해 준다. 실내온도를 2도 낮출 경우 연간 탄소 감축량은 소나무 7억 그루를 심는 효과와 맞먹는다는 신문기사 앞에서는 입이 딱 벌어진다.

산문 안의 경치를 가꾸면서 모범적으로 나무 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임제(臨濟·?~867) 선사는 “천하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시원한 그늘이 되리라(與天下人作陰凉)”는 한 그루의 말씀까지 덤으로 심었다.

어쨌거나 이번 더위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쓴 이산화탄소의 입장에선 참으로 억울하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원철 한문 경전 연구 및 번역 작업 그리고 강의를 통해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하고 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출처 : 원철스님과 문수법회
글쓴이 : 붓다홀릭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