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길눈이 어두운 이들에게

해탈의향기 2014. 10. 14. 14:14

 

 

길눈이 어두운 이들에게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길치'다. 남들은 눈 감고도 가는 길을 나는 두 눈 멀

쩡히 뜨고도 헤맨다. 지난 2년 동안 매주 한 번씩 산에 오르고 있건만 한 번도

길을 잘못 들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길눈 제로'다. 동료들조차 '수없이다

닌 길인데 어떻게 날마다 옆으로 새는지 모르겠다' 며 혀를 내두른다.

  그런데 이렇게 헤매면서 터득한 지혜가 둘 있다. 하나는 아무리 길을 잘못

들어선다 해도 길동무가 있는 한 염려할 게 없다는 것. 다른 하나는 때때로 잘

못 들어선 길에서 또 새로운 길이 발견된다는 것.

  삶의 길 또한 그러하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나는 고전문학을 전공한 박사

실업자였다. 대학 교수가 되는 것만이 내 앞에 놓인 '정통코스' 였다. 하지만,

나는 진입로에 들어서기도 전에 길을 잃고 말았다. 여러 가지 장애가 있었지

만, 특히 여성이라는 조건은 치명적이었다.

  우왕좌왕 헤매다가 나는 타고난 길치답게 문득, 옆길로 샜다. 수유리에 조

그만 공부방을 만들어 세미나를 하고, 강좌를 열었다. 그러자 수많은 길동무

들이 자원방래했다. 그러면서 자꾸 새로운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지식인공

동체 '연구공간 수유+너머' 는 그렇게 탄생되었다. 이후 수유리를 떠나 대학

로로, 다시 원남동으로 옮기면서 지금은 정회원60여 명이 넘는 거대 조직(?)

이 되었지만, 출발 당시에는 소박했다. 길 한번 잘못 들어섰다가 인생역전에

성공했으니, 길눈이 어두운 게 꼭 불운한 것만은 아님이 증명된 셈이다.

  그리고 더 기막힌 행운은 박사 실업자였던 내게 평생 직업이 생겼다는 사

실이다. 처음 듣는 생소한 이름의 '고전평론가' 가 바로 그것이다. 작년에 한

출판사에서 고전을 '리라이팅(rewriting)'하는 시리즈를 낼 때, 얼떨결에 《열

하일기》를 맡게 되었다. 그래서 내친 김에 고전의 드넓은 세계를 현대의 독

자들과 접속시켜 주기로 결심하면서 '고전평론가'라는 직업을 만들어 냈다.

이 모든 행운이 길동무들 덕분인 건 말할 것도 없다.

  삶에 있어 잘못 들어서는 길이란 없다. '삶이 온통 길' 이기 때문이다. 그러

니 길눈이 어두운 자들이여, 두려움 없이 길을 떠나시라. 길섶 곳곳에 수많은

길동무와 예기치 않은 행운들이 숨어 있을지니.

 

 

     고미숙/고전평론가

 

《좋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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