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를 먹고 피는 꽃, 매화
내 전생에는 밝은 달이었지
몇 생이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전신응시명월 前身應是明月
기생수도매화 幾生修到梅花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李滉1501∼1570)선생
은 매화를 무척 좋아했다고 전한다. 매화를 주제로 한 시
가 백여 편에 이르며, 단양군수로 부임했을 때 기생 두향
杜香이 연모의 증표로 준 청매화를 수십 년 동안 애지중지
키울 정도였다. 물론 둘 사이의 애틋한 로맨스가 기본에
깔려 있다. 그리고 좌탈坐脫하면서 남긴 마지막 유언이 "매
화에 물 주어라"였다니 도학자로서뿐만 아니라 가히 매화
마니아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어른이었다. 그래서 몇
생을 거듭하더라도 언젠가 매화로 환생하길 발원했던 것
이다.
조선 중기의 문인 신흠(申欽 1566∼1628)은 그의 저서『야언
野言』에서 '매화는 평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
不賣香)' 는 명언을 남겼다. 많은 꼬장꼬장한 선비들이 이 말
에 힘을 얻어 기개와 지조를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좌
우명 구실을 했을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교보문고 창
립자인 신용호 회장과 수필가 피천득 선생도 항상 이 구
절을 곁에 써놓고서 애송하면서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고
한다. 황벽선사는 여기에 더하여 '뼛속을 사무치는 추위
없이 매화향기가 코끝 찌름을 얻을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남송의 유학자인 나대경羅大經이 지은『학림옥로鶴林玉露』
권6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비구니의 오도송이 기록
되어 있다. 여성 수행자 특유의 섬세함은 이 시 속에서도
충분히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시이기도 하다. 물론 매화
는 깨달음의 매개체인 동시에 깨달음의 내용이기도 하다.
봄(깨달음)을 찾아 밖으로 헤매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지쳐
서 집에 돌아오니 뜰 안에 이미 핀 매화를 보고서 비로소
봄이 왔음을 알았다는 내용이다. 깨달음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갖추어져 있다는 평범한 진리
를 매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종일토록 봄을 찾아 헤맸건만 봄은 보지 못하고
짚신이 닳도록 산 위의 구름만 밟고 다녔네
지쳐서 돌아오니 뜰 안에서 웃고 있는 매화향기 맡으니
봄은 여기 매화 가지 위에 이미 무르익어 있는 것을
진일심춘불견춘 망혜답변농두운
귀래소염매화후 춘재지두이십분
혜능행자가 홍인으로부터 가사를 전해 받고 도망칠 때
등장하는 대유령 역시 중원에서 매화꽃으로 유명한 지역
이다. 이곳은 강서성과 광동성을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이
다. 당나라 현종은 장구령長九齡을 보내 대유령 길을 만들
도록 했다. 하지만 대문호인 그는 길을 만드는 토목공사
에 그치지 않고 인근에 많은 매화를 심어 서정적인 분위
기까지 함께 만들었다. 오가는 길손들에게 여수旅愁를 달
래게 하여 아름다운 매화꽃은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그
리고 거기에 걸맞게 고개 이름을 매령梅嶺이라고 했다. 뒤
에 송나라 문종은 채정蔡挺을 보내 그 길을 다시 손보도록
하였고 매관梅關이란 표석을 세웠다. 하지만『육조단경』
속에는 대유령을 통과할 때 매화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
다. 쫓기느라고 매화를 감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
것도 아니면 매화 피는 시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럼
에도 유명한 화두인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고 생각하지
말라'는 '불사선不思善 불사악不思惡' 화두의 무대로서 선종
사에 길이 빛나는 성지가 되었다.
매화는 눈과 함께 어우러질 때 최고로 친다. 그래서 설
중매雪中梅라고 했다. 누구는 눈 속에서 매화가 피었다고
하고, 누구는 매화가 이미 피어 있는데 그 위로 눈이 내렸
다고도 한다. 선후관계야 어찌 되었건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선사의 선시'설매헌雪梅軒'은 설중매의 눈과 꽃
이 둘이 아닌 경지를 담담히 보여주고 있다.
섣달 눈이 허공에 가득 내리는데
추위에도 매화꽃이 활짝 피었네
흰 눈송이 조각조각 흩어져 날리니
눈인지 매화인지 분간하기 어렵네
답설만공래 한매화정개
편편편편편편 산입매화진불변
ㅡ 원철스님《모두 함께 꽃이되네》중에서 ㅡ
'모두함께 꽃이되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꽃대궐 봄대궐/ 원철스님 (0) | 2013.04.18 |
---|---|
[스크랩] 통일의 꿈을 이룬 환희의 미소 (0) | 2013.04.12 |
[스크랩] ◈ 벚꽃이 진다고 바람을 탓하랴 / 원철스님 ◈ (0) | 2013.03.21 |
[스크랩] 지혜 (0) | 2013.02.02 |
[스크랩] 자연 이치를 거스르지 말지어다 (0) | 2013.0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