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함께 꽃이되네

'문자' 를 먹고 피는 꽃, 매화/ 원철스님

해탈의향기 2013. 3. 26. 06:05

 

 

 

                                                  '문자' 를 먹고 피는 꽃, 매화

 

 

 

                                         내 전생에는 밝은 달이었지

  몇 생이나 닦아야 매화가 될까

 

 

  전신응시명월   前身應是明月

  기생수도매화   幾生修到梅花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李滉1501∼1570)선생

은 매화를 무척 좋아했다고 전한다.  매화를 주제로 한 시

가 백여 편에 이르며, 단양군수로 부임했을 때 기생 두향

杜香이 연모의 증표로 준 청매화를 수십 년 동안 애지중지

키울 정도였다.  물론 둘 사이의 애틋한 로맨스가 기본에

깔려 있다.  그리고 좌탈坐脫하면서 남긴 마지막 유언이 "매

화에 물 주어라"였다니 도학자로서뿐만 아니라 가히 매화

마니아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어른이었다.  그래서 몇

생을 거듭하더라도 언젠가 매화로 환생하길 발원했던 것

이다.

  조선 중기의 문인 신흠(申欽 1566∼1628)은 그의 저서『야언

野言』에서 '매화는 평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

不賣香)' 는 명언을 남겼다.  많은 꼬장꼬장한 선비들이 이 말

에 힘을 얻어 기개와 지조를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좌

우명 구실을 했을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교보문고 창

립자인 신용호 회장과 수필가 피천득 선생도 항상 이 구

절을 곁에 써놓고서 애송하면서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고

한다.  황벽선사는 여기에 더하여 '뼛속을 사무치는 추위

없이 매화향기가 코끝 찌름을 얻을 수 없다고 한 바 있다.

  남송의 유학자인 나대경羅大經이 지은『학림옥로鶴林玉露』

권6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비구니의 오도송이 기록

되어 있다.  여성 수행자 특유의 섬세함은 이 시 속에서도

충분히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시이기도 하다.  물론 매화

는 깨달음의 매개체인 동시에 깨달음의 내용이기도 하다.

봄(깨달음)을 찾아 밖으로 헤매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지쳐

서 집에 돌아오니 뜰 안에 이미 핀 매화를 보고서 비로소

봄이 왔음을 알았다는 내용이다.  깨달음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갖추어져 있다는 평범한 진리

를 매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종일토록 봄을 찾아 헤맸건만 봄은 보지 못하고

  짚신이 닳도록 산 위의 구름만 밟고 다녔네

  지쳐서 돌아오니 뜰 안에서 웃고 있는 매화향기 맡으니

  봄은 여기 매화 가지 위에 이미 무르익어 있는 것을

 

 

  진일심춘불견춘    망혜답변농두운

  귀래소염매화후    춘재지두이십분

 

 

  혜능행자가 홍인으로부터 가사를 전해 받고 도망칠 때

등장하는 대유령 역시 중원에서 매화꽃으로 유명한 지역

이다.  이곳은 강서성과 광동성을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이

다.  당나라 현종은 장구령長九齡을 보내 대유령 길을 만들

도록 했다.  하지만 대문호인 그는 길을 만드는 토목공사

에 그치지 않고 인근에 많은 매화를 심어 서정적인 분위

기까지 함께 만들었다.  오가는 길손들에게 여수旅愁를 달

래게 하여 아름다운 매화꽃은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그

리고 거기에 걸맞게 고개 이름을 매령梅嶺이라고 했다. 뒤

에 송나라 문종은 채정蔡挺을 보내 그 길을 다시 손보도록

하였고 매관梅關이란 표석을 세웠다.  하지만『육조단경』

속에는 대유령을 통과할 때 매화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

다.  쫓기느라고 매화를 감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

것도 아니면 매화 피는 시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럼

에도 유명한 화두인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고 생각하지

말라'는 '불사선不思善 불사악不思惡' 화두의 무대로서 선종

사에 길이 빛나는 성지가 되었다.

  매화는 눈과 함께 어우러질 때 최고로 친다.  그래서 설

중매雪中梅라고 했다.  누구는 눈 속에서 매화가 피었다고

하고, 누구는 매화가 이미 피어 있는데 그 위로 눈이 내렸

다고도 한다.  선후관계야 어찌 되었건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선사의 선시'설매헌雪梅軒'은 설중매의 눈과 꽃

이 둘이 아닌 경지를 담담히 보여주고 있다.

 

 

  섣달 눈이 허공에 가득 내리는데

  추위에도 매화꽃이 활짝 피었네

  흰 눈송이 조각조각 흩어져 날리니

  눈인지 매화인지 분간하기 어렵네

 

 

  답설만공래    한매화정개

  편편편편편편  산입매화진불변

 

   ㅡ 원철스님《모두 함께 꽃이되네》중에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