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문사 처진소나무
기문이 비스타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는 소식은 충주
고뿐만 아니라 충주 전체의 경사였다. 대한민국에서 영어 좀
한다는 쟁쟁한 아이들은 당당히 물리치고 시험에 1등 했다
는 사실보다는 '충청도 촌놈이 공부 잘해 미국에 간다' 는 것
이 대단한 이슈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한국 최초로 선발된
우주인과 같은 존재이니 어찌 대단하지 않았겠는가.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충주에 인물 났다' 며 자랑스러
워했고, 아이들은 '나도 반기문처럼 공부 잘해 미국 가야지'
라는 꿈을 품게 되었다. 동네 꼬마들은 '우리 동네에 반기문
이 산다' 며 자랑하고 다녔다. 하여간 기문이 하나로 온 충주
가 자긍심 파티를 벌일 지경이었다.
충주고 부근에 있는 충주 여고에서는 기문이 미국으
로 떠날 때 미국인에게 전달할 선물로 학생들이 복주머니를
만들었다. 청소년적십자단 활동을 같이 하던 충주 여고의 유
순택이 대표로 기문에게 그 복주머니 선물을 전달했다.
"기문아, 축하해. 영어 공부 그렇게 열심이더니만···.
잘하는 건 알았어도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암튼
건강하게 잘 다녀와."
기문은 쑥스러워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청소
년적십자단 활동을 하면서 고 2 때 처음 만난 순택이는 얼굴
도 예쁘장하고 조용하며 차분한 성격이라 남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좋았다. 공부도 잘해 충주 여고의 학생회장을 할 정
도였다. 기문도 봉사 활동이나 공부 모임을 같이 하면서 마
음에 들어 '순택이는 참 착한 것 같아. 얼굴도 예쁘고. 내가
순택이랑 사귀었으면 참 좋겠어. 같이 도서관 다니면서 공부
도 하고 말이야' 라는 생각을 해왔었다. 그런 친구가 자기한
테 웃으며 축하한다고 해주니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어, 그래! 순택아, 우리 친하게 잘 지내자!"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에서는 "어 ···. 그래 고마
워. 예쁘다. ··· 복주머니···. 복주머니 참 예쁘게 잘 만들었
네" 라는 말만 나왔다.
기문은 충주의 스타가 되었다. 학교에서 특혜도 주어
졌다. 교칙에 따라 1센티미터 이상 기를 수 없는 머리를 기
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사실 특혜라기보다는 학교에서 그
러라고 시킨 것이었다. 이유는 '나라를 대표해 비행기를 타
고 미국까지 가는데 빡빡머리로는 너무 촌티가 난다' 는 것
이었다. 즉 국위선양의 일환으로 머리도 기르고 멋도 좀 내
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충주 시내에서 머리를 기른 남학생은
반기문 단 한 명 뿐이었다.
기문이 미국으로 출국하기 몇 주 전, 미국에 가는 기
문을 축하하고 기념촬영을 하기 위해 학생들이 교복을 반듯
하게 차려입고 모였다. 공부 말고 싸움질이나 연애에 관심
많고, 기타를 들고 다니며 좀 논다는 한 친구는 머리를 기를
수 있는 기문이 부럽기도 했다. 학생주임이 무서워 절대 할
수 없었던 것인데, 범생이 기문은 학교에서 권유까지 해 머
리를 기른다니 장난으로 시비를 걸었다. 사실 기문이랑은 싸
움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싸움이 걸리지 않는 녀
석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이, 반기문. 어, 이거 봐라. 모범생이 머리를 다 길
러? 너 혼자 머리 기르면 다냐?"
"에이 뭘, 나라고 기르고 싶어서 그런가. 그냥 시키니
까 하는 거지 뭐."
기문은 친구의 짓궂은 말에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
다. 돌아서며 생각하니 참 우습기도 한 상황이었다. '저 녀
석은 내가 상장 받을 때는 부러워도 않더니만···. 근데 영어
잘한다고 머리도 기르게 되다니, 우습다.'
기문이가 하는 것이라면 그냥 묵묵히 지켜봐주기만
하시던 부모님도 기문이 출국하는 날엔 생업을 접고 김포공
항까지 함께 가주셨다. 서울에 올라오기 며칠 전에 어머니는
기문이 미국에서 쓸 용돈으로 30달러를 마련해주셨다. 당시
로는 쌀 두 가마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다.
"기문아, 이 돈으로 먹고 싶은 거 많이 사먹고 그래
라, 응."
그러면서 어머니는 행여 잃어버릴까 속옷에 따로 주
머니를 만들어 달아주셨다. 그리고 그 주머니 안에 30달러
를 소중하게 넣어주셨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한 번도 기문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늦게까지 공부하는 아들에겐 오히
려 미안한 마음만 많았다. 대여섯 시에 저녁을 먹고 밤늦게
공부를 하면 밤참으로 감자나 고구마 같은 것이라도 쪄줘야
하는데, 끼니를 감자나 고구마로 때우는 형편이니 간식을 만
들어줄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못 먹고 사는 시
절이니 그랬다.
아이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고 이렇게 '출세' 를 하다니
기특한 마음도 들었지만 부모로서 미안한 마음도 적지 않았다.
기문이 비행기에 타는 것을 보고 난 후 기문의 부모는
다른 선발 학생들의 부모들과 함께 서울의 고급 서양식 레스
토랑에 모여 식사를 했다. 그런데 충청도 촌양반인 기문의
부모는 메뉴판을 보고 음식을 어떻게 시켜야 할지 몰라 했
다. 그나마 대충 알아본 오므라이스를 시켜 식사를 했는데,
다른 부모들을 보니 먹음직스러운 고기를 나이프로 썰어 먹
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내 아들은 많이 배워서 저 고깃
덩이 요리도 척척 시켜 먹어야 할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
다. 자나 깨나 자식 생각, 부모님은 그런 분들이셨다.
ㅡ 신웅진《바보처럼공부하고 천재처럼꿈꿔라》중에서ㅡ
운문사 처진소나무
▼
'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걸음 한 걸음 설계도를 따라서/ 반기문 (0) | 2013.04.08 |
---|---|
꿈의 설계도가 완성되는 순간/ 반기문 (0) | 2013.04.07 |
[스크랩] 꽃 먼저 와서 - 류인서 / Morning Rain - Omar Akram (0) | 2013.04.05 |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도와주고 싶어한다/ 반기문 (0) | 2013.04.04 |
[2013년 '작가' 가 선정한 시]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0) | 2013.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