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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장군의 영어 선생님, 반 이등병/ 반기문

해탈의향기 2013. 4. 18. 20:32

 

 

 

                 백제 금동대향로

 

 

 

 

 

  대학 2학년을 마친 후 반기문은 군대에 갔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이었다.  바로 아래 동생이 대학에 입학하는 해였기 때문에 입주과외로 생활을 어느 정도 혼자 꾸려간다고 해도 집안에서 대학생을 둘이나 가르치는 것은 큰부담이 되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이런 집안 사정이나 먹고 살기 막막해 군대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군대에 가면 식구들에게 입 하나 줄여줄 수 있었고, 자신도 밥을 꼬박꼬박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형편이 괜찮았다면 공부를 다 마치고 군대에 갈수도 있었지만 기문은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냥 형편에 맞춰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군대에 가서도 '공부하는 반 이병' 이었다.  다 같이 똑같은 군복을 입고 있으니 서울대생 반기문이라고 해도 눈에 뛸 리가 없었다.  하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은 가만히 둬도 결국 튀어나오는 법이라나.  반기문의 똑똑한 머리와 화려한 경력을 안 선임하사는 합참의장을 지낸 장창국 장군에게 '반기문이라는 서울대생 수재가 입대했다' 고 보고했다.  장 장군은 반기문 이병을 불렀다.  "반 이병, 자네가 영어를 그렇게 잘하나?"  장 장군은 군복이 약간 큰지 자세가 나오지 않는 반 이병이 왠지 꺼벙해 보여 괜한 장난이 걸고 싶어졌다. 그래서 목소리에 잔뜩 기합을 넣고 물었다.  "아닙니다.  계속 공부하는 중입니다."  목소리에 군기가 제대로 들기는 했지만 반기문다운 겸손한 대답이었다.  반기문은 그렇게 장난을 건 사람을 김빠지게 하는 데가 있었다.  "그래, 그러면 군대에서도 계속 한번 공부해보게."  그렇게 기문은 장군의 영어 개인교사로 차출돼 군 복무를 하게 되었다.  지금도 '힘들다' 는 군대지만 당시 군대는 더욱 심했다.  훈련이 고된 것은 물론이었고, 상급자의 폭력도 많았다.  반기문은 사병으로서 고생도 마다 않고 입대했는데, 영어 덕분에 상대적으로 편한 보직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비교적 편하게 군대 생활을 하면서 반기문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특기가 있으면 어디 가나 특혜를 받을 수 있구나.  내 특기는 영어인데 고등학교 때는 영어 때문에 머리를 기르게 해주질 않나, 고생할 각오를 단단히 하고 군대에 왔건만···.  그런데 이렇게 국방의 의무를 해도 되는 건가?'  제대를 하고 나니 외무고시 제도가 시작됐다.  1968년 복학해 3∼4학년을 다니는 동안 본격적으로 시험을 준비했다.  1기와 2기에 합격한 선배들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 도서관에서 밤낮으로 공부에 열중했다.  지금도 어렵지만 당시에도 단 11명만 뽑는 시험의 경쟁률은 치열했다.  '최선을 다해 후회 없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공부했다.  그렇게 공부한  반기문은 졸업과 동시에 1970년 외무고시 3기에 차석으로 합격을 했다.  가족은 기문이 2등으로 외무고시에 합격했다는 소리에 "만날 1등만 하던 사람이 배아파서 어떻게 2등을 했냐?" 고 했다.  그 시험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시험인지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이 그랬다.  반기문은 "예, 조금 아프네요" 라고 웃으며 받아넘겼지만 그일이 자극제가 되었다.  외교부야말로 정말 치열하게 공부하고 일해야 하는 곳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 사건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외교부 입부 후에 한동안 연수를 받는데 그 성적에 따라 좋은 부서나 재외공관에 발령받기 때문에 성적은 매우 중요했다.  고시에 2등으로 합격해 '배가 아팠던' 반기문은 이 연수 기간 내내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 결국 1등으로 연수를 마쳤다.

 

   ㅡ 신웅진 《바보처럼공부하고 천재처럼꿈꿔라》중에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