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함께 꽃이되네

[스크랩] 해야 할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템플스테이` 2103년 여름호)/ 원철스님

해탈의향기 2013. 7. 17. 16:54

 

 

 

해야 할 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

 

언제부턴가 장거리 운전이 힘에 부친다는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시간과 공간의 장애를 받지 않는 혼자만의 자유로움이 좋아 질주본능(몇 년 전 유행한 자동차 판매광고용 문구)’을 구가하며 달리는 것이 행복했다. 요즘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불편하게 여겨 기피했던 대중교통을 장거리 이동시에는 자연스럽게 이용하게 된다. 그것은 또 다른 행복감을 준다.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목적지로 데려다주었다. 그 사이에 졸리면 눈을 감기도 하고, 무료하면 신문을 뒤적인다. 그것마저도 시들해지면 텅 빈 듯한 눈빛으로 창밖을 가만히 바라볼 수도 있다. 이제 세월 탓인지 여유로운 이동이 더 좋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스님의 베스트셀러 책이름)’의 경지는 아니지만 달리면서도 보이는 것들이 차창너머 가득했다. 멀리 모내기가 끝난 들판의 질서정연한 싱그런 어린모들과 그 아래 바닥에는 맑은 논물이 가득 고여 호수처럼 반짝인다. 가까이에는 하얀 아카시아 꽃들이 무리지어 피어나고 있었다.

그 때였다. “우우웅하고 고요를 깨뜨리는 핸드폰의 진동음 신호가 들렸다. 화면에는 발신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행복하세요라는 문자만 계속 뜬다. 등록되지 않은 낯선 번호였다. 받아도 별로 행복할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수 초간 지속된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받았다. 전화번호가 바뀐 오래된 지인 그러면서도 다소 부담스런 이 었다. 열차 안이라고 양해를 구한 후 용건을 확인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보니 핸드폰에 가장 자주 뜨는 문자가 행복하세요이었다. 처음에는 생뚱맞게 느껴졌다. 여러 번 반복경험 후에는 이 시대의 새로운 유행어인가 보다하고 넘어간다. 발신자 의지가 들어간 것인지, 아니면 통신사의 일방적인 선택문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방을 위해행복하세요라고 축원하는 것은 설사 입에 발린 상업적인 건조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어쨌거나 아름다운 일이다.

 

한 때는 부자 되세요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부()가 행복의 전제조건이라고 믿는 이들이 대부분인 까닭에 공감어가 된 것이다. 수산스님의 행복론(김석종 마음살림)은 그것과 달랐다.‘입으로는 말을 줄이고 위장에는 밥을 줄이고 마음에는 욕심을 줄이라고 하셨다. 한마디로 결국 욕심을 줄이라는 말씀이었다. 욕심이란 성취하면 할수록 더 큰 욕심으로 확장되기 마련이다. 본래 욕심이란 놈은 만족이 없기 때문에 욕심이란 단어로 굳어진 것이다. 알고 보면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아는 소욕지족(少欲之足)의 지혜가 행복의 기술인 것이다. 더 바랄게 없다는 천상세계인 도솔지족천(兜率知足天)은 무엇이건 바라는 것은 다 갖추어진 곳이 아니라 반대로 모든 욕심을 비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일 게다. 부자란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필요한 것이 별로 없는 사람도 부자이긴 마찬가지다. 그 명칭은 해인사에서 암자이름이 되었다. 지족암이다. 예전에는 먹을 게 제대로 없어 별명이 부족암(不足庵)이었다고 오래 전에 열반하신 극락전의 어떤 노장님이 일러주셨다. 지족도솔암이란 편액이 한쪽 켠에 걸려 있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소욕지족할줄 알기에 여기가 바로 땅 위의 도솔천이란 의미였다.

 

 

 

교토 용안사(龍安寺) 장육암(藏六庵)의 차샘(茶泉)에는

"오유지족(吾唯知足:나는 오직 만족할 뿐이다.)"이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를 중심으로 재디자인된 글자의 창조적 조합미가 참으로 돋보입니다.

 

 

 

 

 

다음 정거장을 알리는 방송멘트가 나온다. 아직도 목적지는 온 만큼 더 가야 한다. 주간신문을 펼쳤다. ‘해야 할 일하고 싶은 일에 대한 제목에 눈길이 멈추었다. 갑자기 내 삶이 반추된 까닭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승가라는 것이 단체생활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이제까지 나에게 주어진 해야 할 일만 하고 살았다는 그래서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갔다. 그래! 나도 이제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야. 그러곤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순간 참으로 행복했다. 비록 찰라간 이었지만.

 

그런데 이내 그 꼬리를 물고 우문이 뒤따라 왔다.‘해야 할 일은 알겠는데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은 도대체 뭐였지? 그리고 냉정하게 살펴보건 데 해야 할 그 일이 하고 싶은 그 일을 방해한 적이 있었던가? 괜히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나누는 순간 그것이 불행의 시작은 아닐까? 자문자답이 이어졌다. 구체적인 일상은 해야 할 일이지만 그런 일상 속에서 하고 싶은 일도 생기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도 생기는 법이라고 나름 결론을 내렸다. 이 공식을 기차여행 속에 조심스럽게 대입해 보았다. 있던 자리가 해야 할 일의 영역이라면 가고 있는 자리는 하고 싶은 일의 영역이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공동체 생활의 일상이 늘 해야 할 일이라면 가끔 이렇게 기차를 타고 볼일 보러 떠나는 일탈이 하고 싶은 일인 셈이다.

 

쓸데없이 한 생각 일으키면 만 갈래의 다른 생각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야말로 한 줄기 물길이 만 갈래 파도를 만든(일파재동만파수一派纔動萬派隨) 격이다. 몸뚱아리를 가지고 살고 있는 이상 해야 할 일을 안 할 것도 아니면서 괜히 하고 싶은 일만 찾다보면 해야 할 일 조차도 게을리 하게 되어 결국 불행을 자초하기 마련인 것이다. 지금 있는 그 자리가 딱 제 자리라고 여긴다면 그것도 행복의 한 방편은 되겠다. 기차는 목적지를 향해가고 있는데 결국 내 생각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 왔다.

 

신문의 하단에는 금주의 베스트셀러가 나열되어 있다. 1위는 꾸베씨의 행복여행이었다. 내용보다는 행복이라는 제목이 독자 선택권에 한 몫을 했을 것이라는 지레짐작을 했다. 철학자 스피노자(1632~1677)슬픔을 더 완전하다는 느낌에서 덜 완전한 느낌으로 이행하는 감정이라고 했다. 이를 바꾸어서 말한다면 행복이란 덜 완전한 느낌에서 더 완전한 느낌으로 이행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래나. 하지만 수도승처럼 혼자 사는 것도 아닌 일반인들에게 슬픔과 행복을 어찌 심리적인 면으로만 전부 설명할 수 있겠는가?

 

종착역이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세상사람 모두가 행복하기를 기원했다.

적당한 물질적 여유와 심리적 안정 그리고 주변의 평화가 더불어 함께하길......

 

< 원철스님 >

 

출처 : 원철스님과 문수법회
글쓴이 : 붓다홀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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