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연가/ 유준경
우리 집 은행나무는 혼자였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짝이 없던 은행나무는
연못 속에서 짝을 찾았다
그것이 제 그림자인 줄 모르고
물속에서 눈이 맞은 은행나무
물에 비친 제 그림자에 몸을 포개고
만 명도 넘게 아기를 가졌다
물방개는 망을 보고
연잎은 신방을 지켜 주었다
해마다 가지 사이에 돌멩이를 얹고
그림자에게 시집간 은행나무
한 가마니씩 은행이 나와도
그것이 그리움의 사리인 줄 몰랐다
바람이 세게 불 때마다
연못이 걱정되는 은행나무는
날마다 그쪽으로 잎을 날려 보내더니
살얼음이 연못을 덮쳤을 때 은행잎은,
연못을 꼭 안은 채 얼어 있었다
ㅡ 시집 『다리 위에서 짧은 명상』(도서출판 옴, 2009)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알고 싶은' 은행나무 산책길이 있다고 했다.부석사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800m 쯤 난길을 두고 하는 말인데, 마사토를 다진 황톳길과 노란은행잎이 눈을 황홀하게 만든다. 그 황홀함을 떨쳐야 부석사 화엄경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니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유혹이다. 하지만 나란히 양쪽으로 줄 지어선 은행나무는 대체로 그런 장관을 연출한다. 그와 달리 홀로 우뚝하고 으젖한 은행나무도 많이 있다. 천태산 영국사나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등의 장엄함과 우람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어 차치하고라도 은행나무 한 채 오롯이연못과 짝지어 기가 막힌 풍경을 연출하는 곳이 있다. 지난 해 문화재취재차 찾은 영양 서석지 곁 은행나무가 그러한데, 그때 문화해설사로 부터 들은 은행나무 연가도 이 시의 내용과 비슷했다. 내겐 서석지 은행나무가 감춰두고 혼자 알고 야금야금 찾아가고 싶은 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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