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함께 꽃이되네

미움과 그리움의 두 줄기 눈물

해탈의향기 2012. 7. 20. 16:25

 

  산호침자상 珊瑚枕子上의 이행루 二行淚여

  반시사군 半是思君이요 반한 半恨이라

 

 

  산호베개 위를 흐르는 두 줄기의 눈물이여!

  한 줄기는 그대를 그리워하는 것이요.

  한 줄기는 그대를 원망하는 것이라

 

 

  수절하는 과수댁의 마음을 읊은 것 같기도 하고, 실연

당한 남정네의 연시 같기도 하다.  사랑과 미움이란 동시

교차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애와 증은 동전의 양면처

럼 둘이 아니라고 했다.  흔히들 가장 비참한 사람은 미움

받는 것이 아니라 잊혀진 경우라고 한다.  고전적인 미움

은 언젠간 돌아오리라는 희망의 여지를 담고 있는 미움이

지만, 반면에 잊혀짐이란 완전히 한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짐을 말한다.  따지고 보면 거기에서는 밉고 말고 할

 것이 없다.  그래서 계산 빠른 이즈음 세대들은 미움을 당

하느니 차라리 잊히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훨씬 선적禪的이다.

  그런데 이 선시는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한줄기

씩 나누어서 자기감정을 이입移入한 표현도 멋있거니와 동

시에 미움과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양면성을 동시에 간파

한 탁월한 중도中道법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 연시의 대상

은 부처님이다.  작가는 송나라 때 만암치유萬庵致柔선사이

다.  부처님오신날 거룩한 말씀을 마치고서 마지막 마무리

로 내린 게송偈頌이다.  이는 부처님에 대한 당신의 솔직한

애증의 마음을 동시에 드러낸 그래서 어찌 보면 참으로

제대로 된 찬탄이라고 하겠다.  일방적인 칭송은 찬탄이

아니라 아부에 가깝게 되어버리는 것이 세상 언어이기 때

문이다.

  깨친 성인을 님으로 여기며 혼자 사는 수행자들에게 불

佛祖는 존경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잠시나마 원

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수도 생활이 만족스러울 때야

'부처님 따따봉'이지만 365일 늘 그럴 수만은 없기 때문

이다.  그냥 애초에 제 생긴 대로 살도록 내러벼둘 일이지

괜히 세상에 출현하시어 '너도 부처인데 왜 중생놀음을

하고 있느냐' 라는 그 한마디에 속아 '나도 부처 도리라'

다짐하며 부지기수의 인물들이 집을 나왔다.

  재가자의 신분으로 머리카락을 가진 채 도인의 위치까

지 올랐고 나중에는 모든 가족까지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

한 방온(龐蘊?-808)거사도 처음에는 관리를 뽑는 과거시험

장으로 가다가 마조선사의 선불장(選佛場 부처뽑는집)으로 발

길을 돌린 일은 유명하다.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뒷날 단

하천연(丹霞天然 739-824)선사라고 불리는 수재 거사는 그 길

로 출가를 해버렸다.  장안長安으로 가던 도중 주막에서 만

난 한 선승으로부터 관리가 되기 위한 과거보다는 부처가

되기 위한 과거가 더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원

인이었다. 그 한마디가 괜히 잔잔한 호수에 평지풍파를

일으킨 격이다.

  이런 상황을 보고서 후일까지 입을 닫고 있을 선사들이

아니다.  엄숙한 부처님오신날 모두가 연등을 올리면서 진

리의 길을 밝혀주신 그 공덕을 찬탄하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송대 절조絶照선사는 '갓 태어난 부처님으로

인하여 천지에 가득 번뇌를 일으키게 되었다'며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온 소리를 하고 있다.

  어쨌거나 표현법에 감각의 차이는 있지만 수행 길이 만

만찮은 일이 아님을 반어법으로 말한 것이라 하겠다.  백

번 양보해서 설사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미 닦여져 있는

그 길마저 제대로 찾아가지 못하는 나 자신이 오히려 원

망스럽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역으로 당신을 그리워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각각 성분이 다른 두 줄기의 눈물로써

초파일에 참회와 동시에 우러러 추앙했던 것이다.

 

 

글 / 원철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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