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함께 꽃이되네

강남 귤, 강북 탱자

해탈의향기 2012. 9. 2. 15:43

 

 

그 암자에는 탱자나무가 길게 빙 둘러져 있다.  이런 생나

무로 만들어진 울타리는 이제 일부러 찾아가야만 볼 수

있는 귀한 물건이 되었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산중

은 겨울 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라 잎 없이 뽀족뽀족

한 가시들이 더욱 도드라져 담장이라는 본래 기능에 더없

이 충실하다. 길바닥에는 지난해 떨어진 탱자 열매들이

매마른 채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다.  예전에는 한약재라고

하면서 일부러 익기를 기다렸다가 더러 따가고 하더니 이

즈음은 떨어질 때까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물론

떨어진 이후도 마찬가지이다. 열매가 제값을 못해도 강남갔

던 제비가 돌아오은 춘삼월이 왔음을 아는지 여기저기 가

지 끝에도 파아랗게 물이 오르기 시작한다.

  서귀포에 위치한 그 절은 정원수가 모두 귤나무였다.

구멍이 숭숭뚫린 나지막한 현무암 돌담으로 경계를 친 요

사채의 큰 창문을 통해 밖을 보니 멀리 바다가 한눈에 들

어온다.  눈을 돌려 이른 봄임에도 황금빛의 큼지막한 귤

이 그대로 매달려 있는 것이 신기하여 한참 쳐다보았다.

그곳에 머물고 있는 도반과 함께 오랜만에 차상을 마주하

니 십만 팔천 리 떨어진 강남으로 여행이라도 온 것 같은

느낌이다. 그이는 묻지도 않았는데 '하귤夏橘' 이라고 대답

했다.  육지에서 온 사람마다 모두 의아해하며 물어보는

모양이다.  겨우내내 꽃처럼 나무에 매달려 동절기를 견디

는 만생종이라고 부연 설명까지 해주었다.

  며칠 전 두루마리 상태로 남아 있는 고려에서 처음 만

경전들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 남선사南禪寺로 향하는

연구원들을 배웅했다.  그들은 일보다도 '호시절이라 교토

곳곳에 만개한 매화꽃을 볼 수 있겠다' 라고 하면서 너무

좋아했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이즈음의 강남 풍경을 '항

상 강남의 삼월 풍경을 생각하니 새가 우는 곳에 온갖 꽃

이 향기로우리라' 고 했던가.  봄을 애써 기다리지 않아도

제주도건 일본이건 중국이건 남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언

제든지 봄을 만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귤나무를 생각하니 '남귤북지南橘北枳' 라는 말이 떠

오른다.  물론 원어의 남북은 중국의 양자강을 중심으로

지역을 나눈 것이다.  '강남의 귤 강북의 탱자' 라고 했으

니 같은 나무를 심어도 강 남쪽에는 귤이 열리는데, 강북

에 심으면 탱자가 되므로 그 맛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강남과 강북의 지리적 자연적 환경이 서로 다른 까닭이

다. 하지만 귤과 탱자는 같은 운향과雲香科에 속한다.  그처

럼 양자강은 남북을 갈라놓기도 하지만 또 강을 중심으로

서로를 함께 마주보도록 해주어 다시금 하나임을 일깨워

준다.

  강 남북의 기준을 양자강이 아니라 한강으로 바꾸어 놓

으면 또다른 언어가 된다.  강남의 뚝섬 봉은사는 강북의

잘나가던(?) 상궁들이 나룻배를 타고서 갈대밭을 헤치며

기도하러 오가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화려한 고층빌

딩의 숲 속에 둘러싸인 채 도심 속의 섬이 되어 버렸다. 이

는 몇 십 년 만에 강남과 강북의 가치가 완전히 달라진 까

닭이다.

  이제 지하철 종각역 벽에는 '강남 같은 강북' 혹은 '강

북에서도 이제 강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라는 광고가 심

심찮게 나붙는다.  하지만 이것이 지역적 열등감의 역설적

표현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은 언제든지 위치가 달라

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대변한 '말씀' 으로 읽혀지는 한가

한 토요일 아침, 송나라 야보도천 선사의 시를 가만히 읊

조려 본다.

 

 

  강북에는 탱자되고 강남에선 귤이지만

  봄이 오면 모두 함께 같은 꽃을 피우는구나

 

 

  강북성지강남귤  江北成枳江南橘

  춘래도방일반화  春來都放一般花

 

 

ㅡ 원철 스님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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