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군 화포리에는 성모암(聖母庵)이라는 절이 있다. 절에서
조금 위로 비껴올라간 곳에 잘 손질된 봉분이 하나 있는데, 그
곳이 바로 조선 중기의 명승 진묵대사의 어머니 묘이다. 홀어머
니 슬하에서 자랐던 진묵대사가 모친의 사망 기별을 받고 손수
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火之地 의 터에 묘를 쓰니 비록 자
손을 보지는 못했을지언정 천년이 지나도록 향불을 피우면 제사
를 올리는 사람이 그치질 않을 것이라는 천하명당이다.
실제로 진묵대사가 모친을 위해 손수 마련한 그 묘에 절을 하
면 소원을 성취한다 하여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 향을
피우니 실로 고승의 혜안慧眼과 넓디넓은 대 보살행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에 대한 진묵대사의 극진한 효성은 속가와의 절연 絶緣
을 중시하는 불문에 어긋난다. 그럼에도 진묵대사는 유명한 고
승으로 만인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것은 그가 인간애를 바타으로 한 초탈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문
이다. 대사의 효성스런 행동을 대 보살행이라고 표현한 것도 바
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속세에 연연하지 않되 속세의 중생들을
사랑하는 자애의 마음. 그것을 어찌 미미한 계율의 이름으로 가
둘 수 있겠는가.
어머니를 그리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진묵
대사의 효심이 수백 년을 지나서 다시 어머니에 대한 극진한 마
음으로 피어났으니, 일당 스님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이 책이
야말로 그 꽃이라 할 것이다. 일당 스님의 사모곡思母曲 역시 진
묵대사가 어머니를 위해 묘를 쓰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일찍이
모친을 불가에 여의어 외롭게 자라온 그였지만 모자의 인연을
원망하기는커녕 더한 불심으로 사모의 정을 그렸으니, 팔십 평
생의 그리움이 녹아든 이 책은 필경 천년 사모思母의 향불을 사
를 향기로운 책임에 틀림없다.
일당 스님의 어머니인 김일엽 金一葉은 여성운동의 선봉에 섰
던 신여성이었다. 아버지 오다 세이조는 일본의 명장이며 황궁
皇宮과 도쿄 축조의 주역인 오다 도켄도쿄중앙공원에 동상 건립 의
후손이었다. 세이조의 아버지 오다 호사쿠는 당시 은행총재이면
서 거부로 손꼽혔다. 즉, 정재계를 휘두르는 막강한 집안의 아
들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두 사람의 사랑이 평탄할 리 없었다.
결국 어머니 김일엽은 신여성이니 여류시인이니 하는 속세에
서의 명예를 모두 버리고 돌연 부처님의 품에 귀의하여 제2의
인생을 살았다. 수덕사 견성암見性庵에서의 밤낮을 가리지 않은
혹독한 수행 끝에 속세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
를 깨달고 열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대신 불행을 걸머지게 된 사람들을 간과해서
는 안 된다. 그들은 바로, 사랑했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던 한 남
자 오다 세이조와 불문에 어머니를 빼앗긴 일당 스님인 것이다.
수도에 정진해아 하는 일엽 스님의 입장에서 보면 일당 스님은
애물碍物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엽 스님은 찾아온 아들을 어머
니라 부르지도 못하게 할 만큼 냉정하게 대했다. 그런 어머니를
못내 그리워하여 빈번하게 현해탄을 건너고 수십릿길을 발이 부
르트도록 걸어 찾아갔던 어린 일당 스님의 모습이 눈물겹다.
어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자신의 삶을 허비했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는 사모의 정을 늦추기는커녕 더욱 활활 불살랐다. 그
리고 그 그리움을 예술의 혼으로 끌어올려 위대한 작품을 탄생
시키는 원동력으로 삼았으니 일당 스님이야말로 정말 위대한 화
가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을 단지 '사모곡' 만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그것
은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스님의 일생을 어머니의 그림자가
지배했다고 생각하는 데는 동의하지만. 이 책을 스님 개인의 인
생사라고만 치부해버리기엔 역사적 배경과 스케일이 너무도 방
대하다. 애초에 신여성이었던 어머니와 일본인이었던 아버지의
만남이 말해주듯이 그것은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인식을 요구한
다. 그 만남 속에는 이미 역사적 비극이 잉태되어 있었으며 그
비극의 씨앗이 바로 일당 스님인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민족
의 비극이 한 개인의 삶에 어떻게 투영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우리 민족의 수난사인 것이다.
또한 스님은 일찍이 열네 살 적부터 만공, 탄옹, 동산 , 적음,
백용성, 한용운과 같은 한국 불교계의 큰스님들과 인연을 맺었
으니 이는 운수납자雲水衲子의 수행도정을 연상시킨다.그런 점
에서 본다면 이 책은 불자들에겐 긴 수도행로의 신앙적 고백서
라고도 여겨질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애틋하고 간절한 어머니에 대한 모정을 그린
사모곡인 동시에, 민족사의 비극적 단면과 역사를 조명한 서사
시, 수행과 노스님의 인생철학이 향기로운 신앙서인 것이다.
어찌 됐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책에는 개인적 역사적 아픔
을 딛고 일본이라는 험난한 땅에서 훌륭하게 승리한 한 한국인
예술가의 위대한 혼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일당 스님은 더 이
상 일엽 스님의 애물일 수 없으며 사리처럼 보배로운 존재가 되
었다.
한국인으로 살기 위해 김태신金泰伸이라는 이름으로 줄곧 활
동해왔던 일당 스님. 그분의 뜨거운 삶과 소박한 인생철학의 진
미를 이 책에서 느껴보기 바란다.
ㅡ 편집자 주
ㅡ일당스님《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 》중에서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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