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처님 공부

겨울 채비를 하며

해탈의향기 2012. 11. 11. 16:22

 

  서리가 내리고 개울가에 살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내 오두막에

도 일손이 바빠진다.  캐다가 남긴 고구마를 마저 캐서 들여야 하

고, 겨울 동안 난로에 지필 장작을 골라서 추녀 밑에 따로 쌓아

놓아야 한다.  장작의 길이가 길면 난로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짧은 걸로 가리고 통으로 된 나무는 쪼개 놓아야 한다.  그리고 불

쏘시개로 쓰기 위해 관솔이 밴 소나무 장작을 잘게 쪼개 놓는다.

  산중의 겨울은 땔감만 넉넉하면 어떤 추위도 두렵지 않다.  양

식이야 그때그때 날라다 먹으면 된다.  겨울 동안 수고해 줄 무쇠

난로를 들기름 걸레로 닦아 주고, 연통의 틈새도 은박 테이프로

감아 주었다.

  나는 기질적으로 미적지근한 날씨보다는 살갖이 얼얼한 쌀쌀

한 날씨가 좋다. 내 삶에 긴장감이 돌기 때문이다. 팽팽하게 긴장

감이 돌아야 산중에서 사는 맛이 난다.

  내가 홀로 사는 이유는 누구의 도움이나 방해를 받음 없이 홀

가분하게 내 식대로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이 있을 때 서너

달에 한 번 꼴로 전에 살던 암자에 내려가 이틀이나 사흘을 머물

다 오는 일이 있는데, 남이 해놓은 밥을 얻어먹는 편함과 여럿이

서 먹는 즐거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 생활의 리듬이 느슨해

지는 것 같아 사흘 이상 머물지 않는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끊임없이 가꾸고 챙겨

야 한다.  안팎으로 자신의 현 존재를 살피고 점검해야 한다. 핸들

을 잡고 차를 몰고 가듯이 방심하지 말고, 자신을 운전해 가는 것

이다.  자기 나름의 투철한 삶의 질서를 지니지 않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꼴불견이 되기 쉽고 추해진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늘 새롭다.  새로워지려면 묵은 생각이나

낡은 틀에 갇혀 있지 말아야 한다.  어디에건 편하게 안주하면 곰

팡이가 슬고 녹이 슨다.

 

 

  어느 날 일 끝에 개울가에서 흙 묻은 연장을 씻다가, 끝없이 흐

르는 이 개울의 근원이 어디인지 한번 찾아가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신발을 바꾸어 신고 지팡이를 짚고 나섰다. 두 시간 가까

이 상류로, 상류로 올라갔지만 그 흐름은 끝이 없었다.  이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하, 이 세계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으로 이루어졌는데 개울

물의 근원을 찾아 무엇하겠는가.'

  흙과 물과 불과 바람, 이 네 가지 요소로 이 몸도 일루어졌고,

우리가 몸담아 사는 세상도 또한 지, 수, 화, 풍으로 이루어졌다.

이 네 가지를 떠나서 우리는 살 수 없다.  흙과 땅이 없다면 어디

에 기대고 살겠는가.  물과 불 없이, 바람과 공기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이 가을에 새삼스럽게도 흙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고랭지에서는 상품 가치가 없는 채소는 방치에 버린다. 오두막으

로 올라오는 길에 배추 밭이 있는데, 팔고 남은 이삭이 많아 가을

내내 뜯어다 국도 끓이고 김치도 담가 먹는다.  흙이 아니면 어디

서 이런 신선한 채소를 얻을 수 있겠는가.

  오르내리면서 한동안 역겨운 계분 냄새와 농약 냄새를 맡은 그

보상으로 이삭을 주어다 먹는구나 싶었다.  눈이 내려 쌓이고 강

추위가 오기까지는 이삭 배추의 혜택은 계속해서 입게 될 것이

다. 가을이면 습한 개울가에 진남빛 용담이 핀다. 그 뿌리가 용의

쓸개보다도 더 쓰다고 해서 용담이란 이름이 생겼다는데, 그 용

을 누가 보았단 말인가. 또 그 쓸개의 맛은 누가 보았는가. 이름

에는 그런 허무맹랑한 것이 더러 있다.

  어쨌든 가을 야생화 중에서 용담은 산중의 귀한 꽃이다.  그런

데 이 용담은 늘 입을 다문 채 있다.  활짝 피어 있는 것을 지금껏

보지 못했다.  식물도감을 보아도 대부분 봉오리로 있는 것만을

싣고 있다.

  물을 길러 개울가로 갈 때마다 발치에 유난히 여린 용담이 한

그루 눈에 띄었다.  그때마다 눈여겨보면서 "잘 있었니?" 하고 안

부를 묻곤 했다.  둘레에 많은 용담이 건강하게 꽃봉오리를 머금

고 있는데, 그 한 그루만 외떨어져 여리게 올라와 있었다.  나는

어느 날 그 용담한테 두런두런 말을 걸었다.

  "아직 네 방을 구경하지 못했는데 문 좀 열어 볼래?"

  그 이튿날 물을 길러 개울가에 갔더니 마침내 그 용담이 문을

열어 주었다. 희고 가녀린 꽃술이 보였다. 처음으로 본 용담의 꽃

술이다. 그 용담은, 그토록 가녀린 용담은 다른 용담이 자취도 없

이 사라지고 난 후까지도 자리를 지키면서 나를 맞아 주었다.

  사람의 눈길과 따뜻한 관심이 식물의 세계와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식물학자 루터 버뱅크는 이렇게 말한 적

이 있다.

  "식물을 독특하게 길러 내고자 할 때면 나는 무릎을 꿇고 그 식

물에게 말을 건넨다.  식물에게는 20가지도 넘는 지각 능력이 있

는데, 인간의 그것과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지난여름 절 마당 한쪽에 버려진 덩굴 식물이 눈에 띄어

그걸 주워다 화분에 심어 두었다. 최근에야 그 이름이 '싱고니움'

이란 걸 알았다.  그때는 이파리가 두 잎뿐이었는데 한 잎은 이내

시들고 말았다.  날마다 눈길을 주면서 목이 마를까 봐 물을 자주

주었다.  덩굴은 한참만에 기운을 차리고 새 줄기와 잎을 내보였

다.  받침대를 세워 주고 차 찌꺼기 삭힌 물을 거름 삼아 주었다.

  겨우 한 잎뿐이던 것이 지금은 30여 개나 되는 이파리와 두 자

반이 넘는 줄기로 무성하게 자라났다.  보살핌에 대한 그 보답을

지켜보면서, 식물은 우주에 뿌리를 내린 감정이 있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식물은 인간에게 유익한 에너지를 내보내고 있는데, 투명한 사

람만이 그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기운이

달리면 숲 속으로 들어가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소나무에 등을 기

대고 그 나무의 기운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살아 있는 생명체를 가까이해야 삶에 활기가 솟는다.  식물에서

삶의 신비를 배우고 기운을 받아들이라.   

 

ㅡ법정스님《맑고 향기롭게》중에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