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센터에 전화를 걸어 비용을 문의했다. 대충 듣더니 몇 톤 트럭에 몇 사람이면
되겠다고 어림해 준다. 그러나 막상 집에 와서 견적을 내 보고는 그보다 큰 트럭에 한
사람이 더 필요하단다. 세월만큼 무서운 것도 없는 듯하다. 어지간해서는 살림 들이지
않고 조촐하게 산다고 했는데도 살아온 만큼 짐이 쌓인다. 더 쌓이는 만큼 버렸더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욕심이 발목을 잡고 게으름이 갈 길을 막는다.
이럴 때는 어떤 교수가 제일 부럽다. 그는 방학이면 어김없이 큰 쓰레기통을 연구실
에 끌어다 놓고 필요 없는 책들을 턱턱 버린다. 그런 교수의 연구실은 언제나 필요한
책들만이 정갈하게 놓여 있고, 나 같은 사람의 연구실은 흡사 저 옛날의 청계천 헌책
방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대학원에서 석사 공부를 할 무렵, 어느 원로 시인께 세배를 간 적이 있었다. 소문대
고 그분은 한 마리 학 같았다. 고고한 자태에 근엄한 기운, 그러면서도 온화한 미소를
놓치지 않는, 그 모습 그대로가 오백 년 전쯤에나 계셨을 선비처럼 보였다. 그때는 나
도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되어야 겠다고 다짐했지만, 이제 거울을 보면 영락없는 동네
아저씨다. 두둑한 뱃살에 탁한 눈빛까지, 머릿속 노시인의 모습과는 판이하다. 게다기
아직도 포기 못한 욕망이 가슴을 채우고, 하루하루 바삐 쫓기느라 챙기지 못한 인사도
쌓여만 간다. 하긴, 너저분하게 쌓인 것이 짐이나 책뿐일까.
옛날에 사냥꾼 하나가 깊은 산속에서 사냥을 했다. 마침 잡은 짐승도 많고 이제 바
위 위에 앉아 쉬면서 새참이나 먹을 참이었다. 그런데 저쪽 깍아지른 벼랑 꼭대기에
웬 도사가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사냥꾼은 문득 아득해졌다. '아, 저 사
람은 도를 닦고 있는데 나는 무얼 하고 있는 걸까? 고작 먹고살려고 다른 생명이나 해
치고 살아가니···.' 그는 즉각 잡은 짐승들을 풀어 주고 사냥총도 꺽어 버렸다. 자신의
삶이 너무도 하찮았고, 지금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을 듯했다. 그는 곧바
로 낭떠러지로 몸을 던졌다. 그 순간, 사냥꾼은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듯하더니 하늘
로 치솟았다. 도사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그토록 도를 오래 닦아도 이루지 못한 일을
사냥꾼은 한순간에 이루었기 때문이다.
아, 이 이야기에 혹여라도 오해는 말자. 내가 하는 일이 하찮다거나, 이렇게 무의미
하게 사느니 자살이라도 하자는 뜻은 아니다. 그런 이유로 죽을 것 같으면 세상에 목
숨 부지할 이가 몇 되지 않을 듯하다. 문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던지는 데 있겠다.
무엇이든 열심히 일구어서 겨우겨우 손에 넣고 보면 그것처럼 귀한 게 또 없다.거기
에는 그 사람만의 공력과 역사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등바등 그것을
움켜쥐고만 있다면 그간의 공력은 도로(徒勞)가 되고 영광의 역사는 오욕의 역사로 탈
바꿈할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에서 죽음은 실제 죽음이 아니라 제의적이며 상징적 죽
음이다. 죽지 않고서는 새롭게 태어날 방법이 없으므로 죽음으로써 거듭나는 기적을
일구어 내는 것뿐이다.
도사가 산 위에 올라 고귀한 기도문을 읊조리는 동안. 사냥꾼은 짐승을 죽이며 먹고
살기에 바빴다. 도사가 하늘로 오르려 애쓰는 시간에 사냥꾼은 오히려 땅 밑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사냥꾼은 끝내 도사보다 먼저 하늘에 닿았다. 물론, 세상일이 꼭 이렇
게 귀결되지는 않겠지만, 도사의 도 닦는 일 못지않게 사냥꾼의 사냥 역시 깨달음을
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냥꾼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사냥감을 애처롭게 여긴
순간, 그로써 이미 도사의 십년공부를 넘어선 것이다.
도를 닦을 것인지 행할 것인지, 짐을 늘릴 것인지 줄일 것인지, 남들을 부러워만 할
것인지 자기를 되돌아볼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선 순간순간이 실로 아찔하다. 언감생
심 어찌 사냥을 하면서 하늘을 넘볼까만, 이럴 때는 그저 노시인의 위엄이나 도사의 수
행 또한 우리네의 사냥에서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는 데에 작은 위안을 얻는다.
ㅡ 이강엽《좋은 생각》중에서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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