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심는 까닭은
도심 종로 우정국로와 조계사 주변의 커다란 소나무들은
옮겨 심은 지 몇 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본래 있었던 자
리처럼 잘 어울린다. 지난겨울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서 있
는 그 모습에 취하여 들고 있던 찻잔이 식는 줄조차 몰랐다.
하긴 이 동네의 또 다른 이름은 수송동이 아니던가.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천연기념물 백송은 큰법당 옆에서 오랜
세월 풍상을 버텨오며 그 이름값을 하느라고 여전히 그 기상
이 당당하다.
중국 파두산의 소나무도 그랬다. '재송' 이라고 불리는
노승이 그 산에 살면서 심어 놓은 것들이었다. 그는 당시
에 이름이 없는 뒷방 노장이었다. 틈만 나면 소나무를 심는
것으로 수행을 대신했다. 그런 까닭에 주변에서 그를
'소나무 심는 도인' 이라는 별명으로 불러주었다.
그러던 어는 날 문득 공부가 하고 싶었다. 스승의 방으로
달려가 법문을 청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나무나
열심히 심으라' 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머리가 허옇고 눈
가에 주름이 가득하며 손에 굳은살이 박힌 그를 새삼 공
부시킨다는 것도 어렵거니와 설사 가르친다고 한들 곧 다
비장으로 가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눈치챈 그
는 인위적으로 몸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원하는
바대로 귀와 눈이 총명한 어린애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하여 다서 살 어린 나이로 다시 출가했다. 린포체
인 셈이다.
"스승님! 재송이가 왔습니다."
"무엇으로 그걸 증명하려는가?"
아이는 방 앞의 소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심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열심히 수행했고 나중에는 스승을 이어 그 산
문의 방장이 되었다. 문화에서 유명한 육조(638-713) 혜능
선사를 배출했다. 나무를 부지런히 심은 복으로 스스로의
의지대로 환생했고, 또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는 저력이
되었다.
요즈음 방방곡곡에 개인이 만든 식물원과 수목원이 보
통사람들에게도 적지 않는 관심과 시선을 누리고 있다.
어느 부부가 수십 년 동안 가꾸었다는 섬 전체가 식물원
인 남해 작은 섬의 해상농원은 이미 유명관광지 반열에
올랐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 없이 나무와 인간이 공존할
수 없었다. 임제선사는 나무 심는 이유를 '산문의 경치를
가꾸고 동시에 뒷사람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 이라고
한 말은 모든 독림가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다.
나무 사랑 제일은 일본의 대우양관(1758-1831) 선사일
것이다.
어느 날 머물고 있는 방의 마루 밑에서 죽순이 올라왔다.
점점 자라 마룻바닥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마루를
그만큼 잘라내어 대나무가 뻗어나갈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점점 더 자라더니
마침내 천장까지 닿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시 천장마저 뜯어내 대나무가 뻗어 올라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날씨가 궂으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럼에도 선사는 그 구멍으로 비가
들어와도 눈이 내려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야! 대나무가 많이 컸구나. 많이 컸어."
하긴 모든 것은 가치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는가에 달
려 있다. 그걸 몸소 보였을 뿐이다.
글/ 원철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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