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함께 꽃이되네

모란인지 작약인지

해탈의향기 2012. 6. 15. 19:14

 

 

                 모란인지  작약인지

 

 

 

  가야산 중턱에 자리 잡은 해인사는 지대가 높은 탓에 무

슨 꽃이든지 한 박자 늦게 핀다.  더위가 시작될 무렵에야

작약 꽃을 볼 수 있다.  산문을 걸어 잠근 채 그림자마저 일

주문 밖을 향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정진하는 여름안거가

반쯤 지난 어는 날 오후, 밀짚모자를 눌러쓴 채 온몸에 나

른함을 안고서 산책길을 나섰다.  볕에 달구어진 암자의

뜨거운 마당 한 켠에 만개한 작약 꽃 앞에 한순간 그대로

꽂힌 듯 멈춰 섰다.

  홍제암 사명대사 영당 앞의 작약은 그날따라 유독 붉었

다.  축대 밑에서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기죽지 않는 꽃잎

을 마주하니 더위에 지친 두 어깨에 슬며시 힘이 솟는다.

넓고 푸른 잎의 바탕색깔 때문에 꽃은 더욱 원색적으로

보였다.  어찌 보면 고인들이 단아하고 소박한 절 마당에

어울릴 것 같지도 않은 화려한 작약을 일부러 심어놓은

그 깊은 뜻을 이 여름에서야 나는 읽어낼 수 있었다.

  송나라 때 구양수는 '낙양모란이 천하제일(洛牧丹甲天下)'

이라고 했다.  낙양에 있는 사찰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

최초의 가람인 백마사와 손오공을 데리고 다니던 현장법

사가 오랫동안 머물렀던 자은사는 중원中原의 모란 명소이

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땅의 절집 뜨락에는 부귀영화라

는 이미지의 모란은 차마 심을 수 없었던지 작약으로 대

신해 놓은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그게 작약이 아니라 모

란인 줄 알았다.  그리고 모두가 '모란' 이라고 불렀다.

  백련암 앞뜰 작약 꽃 앞에서 빳빳하게 풀 먹인 광목옷

차림새로 작은 미소를 짓고 있는 성철스님의 모습을 사진

작가 주명덕 선생은 영상으로 남겨 놓았다.  세존께서 대

중에게 말없이 꽃을 들어 보이자 가섭존자가 이심전심으

로 그 의미를 알아차리고 혼자 빙그레 웃었다는 '염화미

소'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붉은 꽃과 회색 옷의

대비는 또 다른 조화로움을 보여준다.  오래 머물렀던 퇴

설당에 여름이 오면 담장 아래 소담스런 작약은 당신이

없어도 여전히 그 꽃잎을 화사하게 드리우고 있다.

 

 

 

 

 

글/ 원철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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