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예비투표
유엔 사무총장을 뽑는 선거는 좀 독특하다. 원래 투표가 있기 전에 스트로 폴(straw poll)이라고 불리는 예비투표(비공식 투표)가 두 차례 있다. 스트로 폴이란 이름은 모자 속에 넣어둔 지푸라기(straw)를 하나씩 뽑아 결정하는 투표(poll)방식 또는 지푸라기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바람의 방향을 알수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이 투표에는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소속 15개 국가가 참여한다. 비공식 예비투표는 2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 단계는 상임이사국과 비상임이사국들이 같은 투표용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투표는 투표용지에 선호(Encourage), 비선호(Discourage), 기권을 의미하는 미정(No Opinion) 세 가지 중 하나를 기입하는 방식이다. 투표 후 결과는 해당 국가와 후보에게만 알려주는데, 이때 누가 가장 많은 표를 얻었는지, 누가 가장 적은 표를 얻었는지를 알려주지만 어느 나라가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는 비밀이다.
두 번째 단계는 상임이사국과 비상임이사국이 색깔이 다른 투표용지에 투표를 한다. 그리고 찬성(Favor), 반대(Against), 기권(Abstention) 중 하나를 표시한다. 이때부터는 상임이사국의 영향력이 확연히 드러난다. 상임이사국들은 '비토' 라고 불리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투표한 나라 중 14개국이 찬성을 해도 상임이사국 중 한 나라만 반대하면 다시 투표해야 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비공식적이기는 하지만 어느 나라가 찬성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상임이사국의 반대가 없이 9표 이상 찬성을 얻는 후보가 나올 때까지 투표는 계속된다. 원칙은 만장일치가 나올 때까지다.
선거운동 과정도 그렇지만 그래서 선거 때도 후보들은 애간장을 태우면서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8대 유엔 사무총장을 뽑는 1차 예비투표는 2006년 7월에 실시됐다. 투표 전날까지만 해도 해외에서는 물론 국내 언론조차도 반기문 후보를 주목하지 않았다. 워낙 엄청난 자리이고 그동안 외교부가 보여준 태도 역시 자신감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 시간으로 오전 10시, 한국 시간으로는 밤 11시에 투표가 실시되었다. 반기문 후보는 1위였다. 의외의 사건이었다. 유엔에 나가 있는 특파원들을 통해 그 결과는 곧 세계 여러 나라로 전해졌다. 15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원국 중 13개 나라가 반기문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반대가 1표, 기권이 1표가 나왔다. 2위인 인도의 샤시 타루르 후보보다 2표가 앞선 것이었다. 한국 언론이 먼저 들끓기 시작했다. 방송사는 긴급 뉴스로 내보냈고, 신문사는 1면 기사로 내보냈다. 하지만 갈 길은 멀었다. 반대표를 던진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는 매우 중요했다. 만약 상임이사국 중 한 나라만 반대한다고 해도 사무총장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7대 유엔 사무총장인 코피 아난도 한동안 프랑스가 반대하는 바람에 상당히 애를 먹었었다. 결국 다른 나라들의 설득으로 프랑스가 반대 의사르 거둬들여 겨우 사무총장이 된 사연이 있었다.
어찌됐건 예비투표이긴 하지만 그래도 1위가 됐다는건 상당히 긍정적인 신호였다. 그런데 2차 예비투표를 앞두고 새로운 후보가 나타났다. 요르단의 왕자이면서 유엔 대사를 하고 있던 자이드라는 사람이었다. 자이드는 국제형사재판소(IOC)와 유엔 평화유지군(PKO)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온 인물이다. 요르단은 중동 국가였지만 유엔에서는 아시아 그룹으로 분류된다. 정부가 우려했던 것도 이런 후발주자, 이른바 다크호스의 등장이었다.
새로운 후보가 나타났으니 다시 처음부터 투표를 시작해야 한다. 외국 언론들은 자이드의 등장을 큰 변수로 평가했다. 1차 투표 결과의 의미를 반감시키는 분위기의 보도들이 이어졌다. 반기문은 그러한 언론의 시각이 매우 섭섭하면서도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곧 외교부 장관 특별보좌관을 통해 긴급 브리핑을 열었다.
"우리 정부는 계속 차분히 선거운동을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추가 후보가 더 나올 것입니다. 다른 후보들에 대해 서는 평가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선의의 경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조심스러운 어법이었지만 여전히 해볼 만하다는 승부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정부는 일단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는 판단으로 선거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그가 2001년 한승수 장관을 따라 들어간 유엔에서 총회 의장 비서실장을 하면서 맺어온 크고 작은 인연이 유엔 사무총장 선거에서도 여전히 상당한 힘이 되어주었다. 성실하고 열정적인 그의 일솜씨를 거의 모든 나라 유엔 대사들이 기억하고 있었다. 반기문과 일을 했던 사람들은 그가 유엔 사무총장이 되는 것을 모두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그때 인연을 맺은 상당수의 사람들이 각 국가의 외교장관이 되어 있었고 영향력도 상당히 커진 상태였다. 당연히 그들의 보이지 않는 후원이 그에게 엄청난 힘이 되었다. 특히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카타르, 콩고, 탄자니아가 포함된 아프리카와 중동의 지지는 대단했다. 그가 외교부에서 일하면서 중동과 아프리카와의 외교에 힘쓴 결과가 그렇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힘든 일정이었지만, 갈수록 한번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ㅡ 신웅진《바보처럼공부하고 천재처럼꿈꿔라》중에서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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