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박
시골 장터가 무싯날인데도 시끌벅적했다. 파릇하게 물오른 모종을 이리저리 살피던 사람들이 인물 훤한 놈을 골라 갔다. 가지, 오이, 고추, 도마토, 호박·····. 다 예쁘지만 유독 호박에 눈길이 갔다. 호박 할머니가 생각나서였다. 그날도 무싯날이었다. 한 할머니가 누렇게 익은 호박을 봉지에 담아 놓았다. 마른반찬을 사 오는 사이 동이 날 것 같아 걸음을 되돌렸다. 호박값을 계산한 뒤 건어물 가게에 들렀다. 가지러 오겠다고했다. "할머니, 돈은 분명히 드렸심데이." 혹시라도 할머니가 호박값을 안 받았다 할까 봐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날 저녁상을 물리고서야 호박을 깜박하고 온 것이 생각났다. 찾아오지 못한 호박보다 할머니가 더 걱정이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해 떨어진 난전에서 나를 기다릴지도 몰랐다. 호박값은 드렸으니 할머니에게 피해 끼치진 않았다며 애써 걱정을 눌렀다.
사나흘이 지났다. 만나면 사과는 물론, 남은 물건까지 듬뿍 사 드리리라 마음먹고 할머니를 찾아갔다. 그런데 얼굴을 제대로 봐 두지 않은 터라 할머니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때 누가 내 등을 특 쳤다. "아이구, 새댁. 와 이제 나왔는교?" 할머니는 그새 물러 버린 호박을 보여 주며 다른 싱싱한 호박을 그냥 가져가라고 건넸다. 바닥에 달랑 한 봉지 남은 호박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는 한사코 안 받겠다고 했지만 나는 기어이 두 봉지 값을 건넸다.
"그럼 오늘은 새댁 덕에 막차 기다릴 것 없이 일찍 들어가겠네." 그날 할머니의 기억력을 믿을 수 없어 입다짐까지 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할머니는 내 얼굴까지 기억했던 것이다. 깔고 앉은 마대를 툭툭 거두며 일어서던 할머니 얼굴이 호박 잎사귀 위에 선연하다.
ㅡ 박영희 《좋은 생각》중에서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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