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꿈.

해탈의향기 2014. 9. 30. 15:15

 

 

꿈.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종류의 꿈은 아니었지만, 내가 가진

여행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이 세상에 존

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면하려고 해도 계속해서 내

주위를 멤돌고 있던 것.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뜨거워지던 것. 하

나 둘 이뤄나갈 때마다 더 큰 갈증이 생기던 것.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나 자신만을 위해서 지켜내고 싶었던 것.

  생각해보면 여행에 대한 동경은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다.  가정

형편상 가족들끼리 외식을 한다거나 어딘가로 휴가를 떠난다거나

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절이라 어린 마음에 더욱더 갈증을 느꼈던

걸지도 모르겠다.  점점 머리가 크면서는 제법 책을 많이읽었는데 그

또한 여행을 갈망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책 속의 주인공들은 꼭 어

디론가 떠나야 했고, 떠난다는 최초의 행위가 존재하지 않으면 장대

한 서사시 또한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단순하지만 강렬한

진리가 내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떠나고 싶다. 나도 떠나고

싶다.  그런 마음속 외침이 내 학창 시절의 한 면을 수노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나는 '여행'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뛰었다.

     그 두근거리는 감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회석되고 사라지기

는 커녕 점점 더 커지기만 할 뿐이었고, 대학교에 입학해서 혼자 자

취 생활을 할 무렵이 되자 걷잡을 수 없이 부풀었다. '아, 어쩌면 좋

지?' 스무 살 때는 그 감정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기만 했다.  어릴 때

처럼 현실이라는 창문에 어두운 커튼을 친 채 아름다운 이상만을

바라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이달 말에 내야 하는 하숙비조

차도 감당할 수 없는 형편에, 뭐가 이상이고 로망이고 여행이란 말인

가.  성적도 잘 나오지 않는데 여행 때문에 더 많은 아르바이트를 해

야 한다는 게 두려웠다.  집에서 받을 수 있는 돈은 한 푼도 없고, 오

히려 내가 얼마씩이라도 보내드려야 하는 처지인데, 왜 이렇게 헛된

꿈을 마음속에 품고 있느냐며 나 자신을 다그치기도 했다.  나는 그

렇게 현실과 타협하려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너무나 한심한 변

명 같지만 하숙비, 생활비, 교통비, 교재비, 휴대폰 요금......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어른아이에게는 그 모든 것들의 무게만으로도 삶이 벅

찼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인생이란 참 묘했다. 지금보다 아르바이트를

더하면 성적이 떨어질 것 같아 두려웠던 대학교 초기는 오히려 최악

의 학점만이 쏟아져 나올 뿐이었고, 남는 시간은 아무 의미 없이 허

투루 보내기 일쑤였다.  이건 아닌데, 이러려던 게 아닌데. 그럴 때마

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꿈'을 뒤편으로 던져놓고 어설픈 변명들로 단

단히 덮어버리기까지 한 그 비겁한 행동들이 떠올랐다.  상황을 개

선하기 위한 일말의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불우한 환경만을 탓하며

상처 입은 피해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고 바보 같

고 밉기까지 했다.

     그때부터였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더 찾아보고, 여행 통장을 만

들고, 자투리 시간을 짜내 과제를 하고, 잠을 줄이고, 진심을 다해

학업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는 안 돼, 절대로 불가능해'라

는 생각이 '왜? 왜 안 되는데?' 라는 당당한 의문으로 점점 바뀌어갔

고, 눈부실 정도의 가시적인 결과들이 하나 둘 쌓여갓다. 통장에서

점점 몸집을 불려가던 저축금, 꾸준하게 상승한 성적,그리고 수많은

새로운 만남까지.

     나는 그렇게 6년에 걸쳐 어린 시절의 꿈을 하나씩 하나씩 이뤄

나가기 시작했다.  세계 곳곳에 내 발자취를 남기고, 그곳의 풍경과

언어와 문화를 습득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의 수

만큼이나 특별한 삶들을 배웠다.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새카만 장막

을 내 손으로 걷어내고 그 안에 현실의 가능성을 담아나갔다. 그 소

중한 시간이 모여 나 자신을, 그리고 내 인생을 바꿔나갔고,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책은 그런 '소중한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노경원 / 그럼에도 여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