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현경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옵니다. 저는 기독교 신학자
지만 부처님 오신 날에는 꼭 절에 가서 부처님의 생
신을 축하합니다. 부처님은 한 종교를 넘어 모든 인
류에게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법을 가르쳐주신 큰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불교에 빚을 많이 진 사람
입니다. 제 젊은 날 가슴에 끓어오르는 고통의 불길을
끄는 데 불교처럼 큰 도움이 된 가르침이 없었습니다.
막연히 학문적으로, 이론적으로만 공부하던 불교를 제게 체험으로 가르쳐주
신 분은 세계 60여 나라에 한국 선원을 세우신 숭산 선사입니다. 저는 30대 중
반에 보스턴 하버드대 근처에 있는 케임브리지 선(禪)센터에서 숭산 스님을 처
음 만났습니다. 그때 저는 겉으로는 젊은 나이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
로는 인생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아 깊은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하
버드대에서 종교와 여성에 관한 수업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각사' 라
는 현판이 걸린 케임브리지 선 센터를 보게 되었고, 마치 지남철에 끌린 듯 그
곳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마음의 고통에 시달리는 저에게 숭산 스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불교의 첫 번째 진리는 인생이 고통이라는 것이다. 당신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고통받고 살고 있다.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되고 싶으면
선방(禪房)에 조용히 앉아 깊이 숨 쉬며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그리고 물어
라. 인생이 고통스럽다고 울고 있는 이 물건은 무엇인가?"
그 자리에서 시작한 명상의 힘은 숭산 스님의 가르침대로 저를 서서히 내면
의 고통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때 제가 마음공부를 하던 관음선원
에서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세 선사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습니다. 그분들은
경허, 만공, 고봉으로 내려오는 숭산 스님의 직계 스승님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세 분 중에서도 특히 숭산 스님의 증조할아버지 격인 스승, 경허 선사께 마음이
많이 끌렸습니다. 경허 선사는 문수보살이 지닌 진리의 날카로운 검과 관세음
보살의 한량없는 자비는 물론, 그리스 로마 신화의 디오니소스, 바쿠스 같은 신
들의 즐거운 축제 기운까지 체화한 도인, 기인, 대자유인으로 느껴졌기 때문입
니다.
그런데 좋은 인연으로 경허 선사를 깊이 만날 기회가 지난 3월 제게 주어졌
습니다. 한국 조계종 경허 선사 100주년 기념회와 함께 경허 선사에 대한 다큐
멘터리를 만드는 작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항상 존경하고 많은 것을
배우며 함께 일해오던 컬럼비아대 종교학과의 불교학 주임교수 로버트 서만 교
수님이 경허 100주년 다큐멘터리의 내레이터가 되셨고, 저는 그분을 보조하고
통역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경허 선사의 자취를 좇아 경허 선사
가 머무르셨던 절과 암자를 찾아 함께 순례여행을 하였습니다.
이 여행을 통해 더욱 깊이 만나게 된 경허 선사는 원효대사처럼 도가 깊은 선
지식(善知識)이면서 동시에 자유롭고 호탕한 큰 스승이셨습니다. 그는 1846년
에 태어나 1912년에 입적한, 구한말의 격동기를 살다 간 인물입니다. 당시 조
선은 밖으로는 식민지 세력들이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안으
로는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를 향한 민중의 봉기가 끊이지 않던 대혼란기였습니
다. 조선 시대의 억불 정책은 스님들의 힘을 약화시켜 한국 선맥(禪脈)은 흐려지
고 불교는 산속에 숨어 들어가 생존을 위한 기복신앙 쪽으로 변해가고 있었습
니다. 경허 선사는 그러한 시대의 아픔 속에서 쇠퇴한 법맥을 다시 깨워 일으킨
근대 한국 불교의 증흥조(中興祖)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허 스님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 9세부터 절에서 살다 14세
에 출가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동학사에서 불교 경전, 노장사상과 유교사상
까지 두루 섭렵하고 23세엔 이미 명강사로 이름을 날렸다고 합니다. 그더던 어
느 날 스승을 뵈러 가는 길에 비를 피하러 들어갔던 마을에서 사람들이 콜레라
로 죽어가는 걸 목격하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풀어보겠다고 결심합니다. 동학사
로 돌아가 가르치던 학생들을 다 돌려보낸 그는 깊은 정진에 들어가 34세의 나
이에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 후 경허 선사는 큰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전하고
전국 곳곳에 선원을 지어 죽어가던 한국 불교의 선풍(禪風)을 일으킵니다.
해인사의 조실(祖室, 참선을 지도하는 직책)로 계실 때, 먹을 것을 동냥하러 온 여
자 나병환자를 스님들이 쫓아버리려 하자 그녀를 방에 들이고 겸상을 해 같이
식사를 하신 후 그녀를 한동안 자신의 방에서 함께 살게 한 에피소드는 진정으
로 자유로운 경허 스님의 깨달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경허 스님은 삷의 마
지막 10년간 홀연히 사라져 일반인처럼 머리를 기르고 산골에서 서당 선생님
으로 어린이들을 가르치다, 선시 한 수를 쓴 후 붓을 던지고 자는 듯이 돌아가
셨다고 합니다. 그때가 경허 스님이 67세가 되신 해였습니다.
경허 스님이 마지막 쓰신 선시는 이렇습니다.
마음 달이 외로워 둥그니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이 무엇인고.
한국에 이런 큰스님이 계셨다는 것은 우주가 내린 더할 수 없이 큰 축복입니
다. 경허 스님의 치열한 구도, 난세를 살던 한국 민중을 향한 바다 같은 보살심,
한국 불교의 선맥을 다시 일으킨 종교개혁자로서의 삶, 그의 경계 없는 자유와
바람 같은 풍류는 참으로 깨달은 자가 사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경
허 스님 열반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우리도 경허의 깨달음에 힘입어 더 깊은
자유와 자비의 삷 속으로 한 발자국 나아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월간지 샘터 / 2012년 5월
현경- 기독교 신학자이며 뉴욕 유니언 신학대학원의 종신교수로, 불교와 기독교의 대화,
생태여성신학, 종교와 평화운동 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계80여 나라를 다니면서 달
라이 라마, 데즈먼드 투투, 메어리드 매과이어와 같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과 함께 종교
간 세계평화위원회의 자문으로 일한 여성. 환경. 평화 운동가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이
슬람 17개국을 탐사하고 200여 명의 무슬림 여성 평화 운동가들을 인터뷰하여 5년 만에
완성한 이슬람 순례기 <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웅진지식하우스)을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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