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림열반상
:부처님이 남긴 이십년 그늘
해인사에서 국도를 따라 대구로 가다보면 고령 못 미쳐 ‘쌍림’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아마 동네 어디엔가 큰 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 모양이다. 부처님 열반지의 사라쌍수 처럼. 쌍림 즉 사라쌍수는 부처님 열반 소식에 나무가 하얗게 말랐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학림鶴林이라고 번역했다. 나무가 하얗게 마르는 걸 학이 가지에 가득 앉은 것으로 비유한 그 적극적 상상력은 가히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까만 숯도 언젠간 하얀 눈을 이고 있던 나무가지였겠지.’라는 일본 시가처럼 말이다. 언젠가 팔공산 기기암을 갔더니 마당에 두 그루의 큰 나무가 하얀 꽃을 가득 달고 서 있었다. 그걸 보자 학림이라는 사라쌍수가 떠올랐다.
부처님은 돌아가시면서 법왕으로서 국왕의 장례식에 준하도록 아울러 부탁했다. 강원에서 치문 과정을 배울 때 서울 강남의 봉은사 영암 스님 다비식에 모든 산내 대중이 참여하게 되었다. 영암스님은 해인총림의 기초를 놓은 초창기 공덕주다. 내가 최초로 본 큰스님 다비식이었다. 의식의 장엄함은 국장國葬을 연상시키고도 남았다. 이렇게 장례식이 화려한 것은 부처님의 유언 때문이라는 것을 뒷날 알게 되었다.
다비장은 단순한 장례 공간이 아니라 공부하는 곳이다. 병원 영안실이나 화장터에서 망자를 위해 염불이라도 다녀오는 날은 정말 무상을 실감하게 된다. 재산과 명예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포함한 모든 소유물을 버려둔 채 한 줌 재만 남기고서 허공으로 돌아간다.
눈 밝은 선사들은 부처님의 다비장에서도 후학들을 위하여 화두를 제시했다. 입관이 이미 끝났는데 뒤늦게 도착한 가섭존자가 부처님의 법신 뵙기를 원하니 그와 그 일행들을 위하여 ‘관 속에서 두 발을 내밀어 보였다’는 곽시쌍부槨示雙趺’가 바로 그 공안이다.
중생의 마음이 부처님이 오래 이 세상에 머물러 주시기를 바라는 건 당연하다. 부처님은 열반에 드실 뜻을 세 차례나 아난존자에게 말씀했다고 한다. 당연히 시자는 그때마다 ‘오래오래 이 세상에 머무시어 무수한 사람이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하셔야지요.’라고 간곡히 부탁했어야 했다. 그런데 시자는 무슨 일인지 가만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가섭존자는 이 부분을 서운케 여겼던 것이다. 이에 아난은 부처님의 그 말씀을 듣지 못했노라고 변명했다.
“사형스님! 내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마魔가 내 마음에 붙어 나로 하여금 부처님의 그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여 이 세상에 더 머무시도록 청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것이 아난이 말리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아난은 이 일로 대중 앞에서 참회를 하게 된다.
선종에서는 이를 적극적인 의미로 받아들였다. 즉 세존은 본래 백수를 누리셔야 했다. 그러나 일부러 여든 살에 열반에 드셨다. 왜 일까? 당신이 누릴 이십 년의 복을 남겨서 남아있는 제자들에게 돌려주기 위한 자비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세존 이십 년의 남아있는 그늘(유음遺蔭)’이라고 부른다. 그 복으로 진리의 수레바퀴가 오늘까지 굴러올 수 있었다는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
원철스님의 <아름다운 인생은 얼굴에 남는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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