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외교관이 흘릴 수밖에 없는 눈물
외교관이라고 하면 흔히 연미복을 차려입고 와인 잔을 든 채 근사한 사교 파티에 가는 것을 연상하곤 한다. 하지만 외교 일선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외교관은 총과 칼 대신 말로 전쟁을 하는 투사이기 때문이다. 외국 생활은 흔히 유랑 생활에 비유된다. 생전 처음 가보는 낯선 나라에서 생활해야 하고 겨우 자리 잡을 만하면 떠나야 한다.
몇 년 만에 돌아가는 조국은 또 얼마나 낯선가. 한국에서 일을 해도 그렇다. 일을 열심히 하기도 했지만 외교관이다 보니 해외 근무도 많고 출장도 워낙 많아 고향에 자주 갈 수가 없었다. 전화를 자주 드리긴 해도 직접 부모님을 뵙지 못하니 늘 마음에 걸렸다.
1991년 12월 반기문은 미주 국장으로 판문점에서 열리는 북한과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협상에 참여하고 있었다. 6·25 전쟁 이후 표면적으로 한반도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종전이 아니라 정전 상태로 언제든지 불행한 사태가 벌어질 수 있었다. 거기다 북한은 지금도 그렇지만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기 위해 또는 체제의 안정을 보장받기 위해 종종 핵무기 개발을 위협 수단으로 사용했다.
크건 작건 북한이 한 번씩 '핵무기' 를 언급할 때마다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는 물론이고 전세계의 안전과 평화가 흔들렸다. 비핵화 공동선언은 남한도 북한도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었다. 국가적으로도 중대했지만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사안이었다.
협상장에서 오고가는 대화들은 유괘한 것이 아니었다. 목적은 같더라도 서로 얻을 수 있는 것, 줄 수 있는 것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일은 늘 해왔던 것이라도 신경을 예민하게 했다. 북한과의 대화는 쉽지 않았다. 잠깐의 휴식 시간이 생겨 협상장 밖으로 나와 숨을 돌리며 사안들을 검토하고 있을 때였다. 잔뜩 그늘진 표정으로 보좌관 한 명이 급하게 다가왔다. 보좌관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반기문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머리가 멍해졌다. 귀에서 '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는 소리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바로 협상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협상에선 오고가는 말,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가 저절로 악하고 물어졌다. 눈에서 눈물이 뿜어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몇 시간이 흐른 후에야 협상은 일단락 지어졌다.
반기문은 아버지의 빈소가 있는 충주로 향했다. '쾅' 하고 차 문을 닫는 소리를 듣자 눈물이 쏟아졌다. 언제나 무엇보다도 나랏일이 먼저였다. 소중한 사람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러웠다. 아버지 운명하시는 자리에 있지 못한 것도 불효인데, 부음 소식을 듣고도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갈 수 있다니 세상에 이런 불효막심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건강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은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여느 때처럼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에 치였는데 그것도 뺑소니 사고였다. 범인도 못 잡고 장례를 치렀다. 조문을 온 친구에게 그는 회한을 털어놨다.
"지금 이 순간은 외교관이 된 것이 너무도 후회가 되는구먼. 소중한 것을 너무도 많이 잃었어. 외국으로 떠돌다 보니 친구도 많이 잃었고 친척들도 하나도 못 챙겼어. 이제 아버지까지 돌아가셨으니···."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눈물을 흘렸다.
장례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뺑소니 범인을 잡았다.
그런데 잡고 보니 너무도 기가 막혔다. 사고 직후 아버지를 병원으로 싣고 온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태워오느라고 뒷좌석에 피가 묻었다면서 세차비까지 받아갔던 작자였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식구들에게 "쓰러져 있는 사람이 딱해서" 라고 했었는데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가족이며 친척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높은 형량을 매겨도 분이 풀리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 사람을 용서해주자고 하셨다.
"어머니! 그런 놈을 어떻게 그냥 둡니까? 절대 안 돼요."
"야야, 그런다고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시냐?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어떻게 하셨을지를 생각해보거라."
반기문의 형제들은 할 말이 없었다. 서로의 눈을 쳐다봤다.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오셨던 분이던가.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분이 삭지 않았지만 범인을 용서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용서하고도 남을 분이기 때문이었다.
장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그는 곁에서 지키질 못했다. 2006년 4월 장관으로서 유럽 6개국을 순방했는데, 마지막 순방지인 이탈리아에 있던 그에게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장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장모님은 누구보다 외교관으로서의 격무를 잘 이해해준 분이었다. 그런 장모님을 더는 뵐 수 없다는 게 가슴이 무너지도록 아팠다.
결혼하기 전 장모님은 반기문 내외를 앉혀놓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모름지기 남자가 해 지기 전에 집에 오는 것은 직업이 없거나 큰 병을 앓고 있을 때 둘 중의 하나이니 반 서방이 집에 늦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 뭐라 하지 마라."
해외로 떠돌아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위를 만나 혹시라도 딸이 고생할까 걱정을 늘어놓으실 줄 알았는데 뜻밖의 말씀이었다. 덕분에 외교관으로 해외를 떠도는 동안에도 장모님만 생각하면 언제나 마음이 든든했다.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 늦게나마 장모님을 마지막 모습을 뵙고 상을 치러야 한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데 한국으로 향하던 대한항공 비행기가 뜨고 얼마 되지 않아 보좌관이 자리로 찾아왔다.
"장관님, 대학생 한 명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일단 안정은 시켜놨는데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 무엇보다 사람 목숨이 중요하지. 얼른 조종사에게 돌아갈 수 있는지 알아보세요."
기장은 보좌관이 전한 반기문의 지시를 받고 회향을 결정했다. 체코의 프라하에 가까운 공항이 있어 그리로 향했다. 비행기가 뜰 때는 기름을 가득 싣고 이륙한다. 하지만 착륙할 때는 기름 탱크를 가볍게 비워야 한다. 기장은 공중에 기름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무려 1천만 원어치였다. 반기문은 보좌관을 불렀다.
"그 학생 빨리 치료받아야 하지 않겠나. 체코 대사관으로 전화해 응급차를 준비하라고 하세요."
비행기는 1시간 만에 프라하 공항에 도착했다. 쓰러진 학생은 대기 중인 응급차에 실려 바로 병원으로 이송됐다. 비행기는 프라하 공항에서 급유를 하고 다시 출발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학생은 결국 숨지고 말았다.
반기문은 이런 때, 해외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변을 당하거나 생명을 잃었을 때 견딜 수 없이 참담했다.
해외에 있는 한국인들의 안전을 보호하고 지켜줘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김선일 납치· 피살 사건은 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2001년 차관에서 퇴진했다 2004년 장관으로 취임했을 때였다. 이라크 전 (미국의 9·11테러에 대한 응징과 이라크 국민의 자유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미국과 영국 등의 연합군대가 후세인 이라크 정부를 상대로 2003년에 벌인 전쟁) 으로 중동 일대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슬람 무장 세력들의 반발로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군인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민간인들까지 시가전과 테러로 죽어나가는 상황이었다. 우리나라 외교부는 이라크와 그 근방 국가에 거주하고 있던 우리나라 국민을 대피시켰고, 그 지역 쪽으로의 출국도 자제시켰다. 그런데 무역 회사에 근무하고 있던 김선일이라는 청년이 이라크에 남아 일을 하다가 그만 한 무장 단체에게 납치를 당한 것이었다. 외교부에서는 김선일을 구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손을 썼지만 그는 끝내 무참히 살해되었다. 대한민국 전체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게다가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면서 외교부에서 사건 초기에 안일하게 대처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국민은 외교부를 신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해 겨울에는 인도네시아 휴양지에서 '쓰나미' 라고 불리는 지진해일 참사가 벌어졌다. 휴가와 신혼여행을 떠났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엄청나게 희생되었다. 외교부에 대한 불신은 날로 커졌다.
외교부 장관으로서도 그랬지만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도 너무 큰 상처였다. 자신의 능력이 한없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안타까운 감정으로 가슴만 짓누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갈수록 해외로 나가는 국민은 늘어나는데 외교부 직원은 재외공관까지 모두 합쳐도 천여 명에 불과했다. 예산도 부족했다. 현실은 그렇더라도 마냥 손을 놓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는 긴급회의를 소집해 영사 서비스를 개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몇 달 동안 계획해 영사 콜센터를 만들었다. 영사 콜센터는 해외에서 위급한 상황이 생겼을 때 전화로 대응 조치를 알려주거나 현지 영사관 등으로 바로 연결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해외에서 현지 영사관에 직접 도움을 청하면 좋지만 경황도 없거니와 해외 공관의 전화번호를 적어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래서 한국으로 전화를 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 이 영사 콜센터 제도는 좋은 아이디어로 소문이 나 다른 나라 외교부에서 배워가기도 하는 우수 사례로 꼽힌다.
ㅡ 신웅진《바보처럼공부하고 천재처럼꿈꿔라》중에서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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