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속의 티타임
최근에 비슷한 얘기를 두 가지 들었는데, 아주 중요한 일이기에 쓰기로 한다.
고베 지진 때 일이다.
한 가지는 아이호시 씨라는 멋진 그릇을 제작하는 도예가의 블로그에 쓰여 있
는 글이었다. 지진 발생 후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거리의 가게에서 '애프터눈 티
(오후 3∼4 시경에 간단한 음식과 빵을 곁들여 홍차를 마시는 영국의 관습)'를 다시 팔기 시작했
더니, 가게 앞에 사람들의 긴 줄이 생겼다. 그 광경을 보고서 자신이 어떤 그릇을
만들고 싶어 하는지 비로소 방향성이 확실해졌다는 얘기.
다른 한 가지는 시마부쿠 미치히로라는 예술가의 얘기다.
그는 '아, 차 한잔 마시고 싶다. 하고 생각했을 때 찻집 쪽에서 찾아오는' 아트
에 착안, 바다 위에서 찻집을 열기도 하고, 가게를 포장마차처럼 이동하면서 차를
파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나는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고베 지진 당시, 고베가 고향인 그는 현지로 달려가서 그 노하우를 살려 커피를
공짜로 끓여주기도 하고, 역시 커피를 무상 배부하는 아줌마들을 위해 간판을 만
들고 페인트로 칠했다고 한다. 지진의 잔해 더미 속에서 색깔이 생겨나자 사람들
도 아름다운 색과 디자인을 원했고 자신도 기뻤다고 쓰여 있었다.
그때까지 자신을 예술가라고 자칭하지 않았던 시마부쿠 씨는 잔해 더미 속에서
전단지를 만들고 포스터와 간판을 만드는데 "자네, 일이 없는 건가? 찾아줄까?"
하고 말을 건네는 아저씨에게 "나는 예술가입니다. 이게 나의 일이에요" 하고 선
언했다고 한다.
옛날에 읽었는데, 식생태학자이면서 탐험가인 니시마루 신야 씨는 오이를 굉장
히 싫어하지만 정말 굶주리고 절박해지면 먹겠지 하고 생각했으나, 전쟁 중에 거
의 죽어가는 데도 오이는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얘기와 그 얘기는 아주 대조적이다. 하지만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미슷하다.
그렇다, 아무리 경제가 어렵고 생명을 위협하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 때라도 사
람은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순간을 추구한다. 그리고 아무리 힘겨운 때라도 정말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는 일은 없다. 마음은 자유다.
차를 마시면서 즐기는 잠깐의 여유는 재해나 긴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배제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이다. 그리고 편식하지 않고 무엇이든 잘 먹는 게 좋다는 것
을 알지만, 싫은 것은 역시 싫다.
인류에게는 이런 것들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이 세 가지 이야기를 통해 확
신하게 되었다. 또한 '지진의 잔해 더미 속에 차린 찻집' 같은 소설을 쓰고 싶다
고 진심으로 생각했고, 언제까지나 어린애처럼 '오이'는 싫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하자고 다짐했다.
요시모토 바나나 -<키친><도마뱀><아르헨티나 할머니>등을 쓴 일본 소설가입니다. 열대 지방에서만 피는
붉은 바나나 꽃을 좋아하여 '바나나'라는 성별 불명, 국적 불명의 필명을 생각해냈습니다. "우리 삶에 조금이
라도 구원이 되어준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좋은 문학"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바나나
키친>(민음사)은 먹거리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은 에세이로, 이 글은 그중 백한 번째 에세이를 옮긴 것입니다.
ㅡ 내가 만드는 행복, 함께 나누는 기쁨 《 샘 터 》중에서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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