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본 자연이다. 루소는 공의 소식을 몰라 "자연, 자연!"하고 부르짖으며 버둥거리다가 그만 가 버렸다.
루소는 지금쯤은 느끼는 자연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서 자연의 출구를 발견하였는지도 모른다.
공이 만유(萬有)의 내적 본질이요, 생령의 본체요, 혼의 대 휴식처요, 생각하게 하는 나요, 우주의 창조주다. 공을 여읜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공은 마음의 마음이요, 일체 생의 씨다.
생령은 공에서 떠나 살게 되면 항상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치지 못한다. 인간이 공을 여의기 때문에 자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이 언제나 아쉬움이 가셔지지 않는 것은 공이란 자기 본 고향에 대한 향수적 고민 때문이다. 가장 만족한 생을 누리려거든 공을 여의지 말아야 한다.
가장 높고, 귀하고, 부하고, 자유롭고, 편한 생활을 바라거든 본 고향인 공으로 돌아가라.
공을 여윔이 없는 현 생활이건만 늘 구하고 괴로운 생활을 하는 것은 마치 밥통 안에서 주리는 것 같은 일이다.
공이, 즉 만(滿)인 것을 모르는 그 무지 때문이다. 공만 얻으면 만유는 자동적으로 나의 것이 된다.
우리는 가장 큰 무지는 무진장의 보고(寶庫)인 공이 내게 지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보고 중에서 가장 가치 없는 이 몸을 보배로 알기 때문이다. 장차 썩어질 이 몸은 생명의 껍질이다.
공에는 시종도, 생사도, 고락도 없는데 느낌이라는 이변이 생사와 고락을 만들어 낸 것이다.
금덩이가 보배지만, 깨뜨려 만드는 데 가치가 있고 소용품이 된다.
공은 일체의 바탕이므로 공을 가지면 못할 것이 없다. 짐승이라는 말은 공이 자기의 자기, 즉 본 마음을 찾아 쓸 줄을 모르는 존재의 일체를 가리킴이다.
금 덩어리 전체를 다룰 줄 아는 자가 기술자임과 같이 공을 남김없이 파악하여 쓰는 존재가 부처요, 하느님이란 인간이다. 부처님이나 하느님이란 선생에게 귀의(歸依)하는 뜻은 공인 내 전체적 정신력을 잘 다루는 일 즉 우주 창조자인 기술자 되는 법을 배우자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하느님은 공을 파악하여 그 재료로 우주를 창조한다. 예수교에서 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과 불교에서 몸과 혼을 남김 없이 살라서 느낌이란 여운까지 없이 하라는 말씀이 다같이 공에 체달하라는 말이다.
예수교의 교주도 공에는 체달 못했는지 <성경>에 명확히 해설이 없는가 한다. 공은 이론이나, 글이나, 말이나, 표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각자가 이 자리에서 시공(時空)의 제재를 안 받는 공의 시간, 즉 느낌까지 끊어진 경지,적적(寂寂)하고도 성성(惺惺)한 그 시간을 얼마든지 마음대로 가질 수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런 경지에 체달되었다면 한 생각을 일으킬 때 우주가 일어나고, 한 생각이 소멸될 때 우주는 사라진다. 내 한 생각의 기멸을 따라 생사와 건괴(建壞)가 있는 것이다. 우주가 자체가 되어 신축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인간이면서 인간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공만 얻으면 만유는 모두 내 것이 된다. 공만 얻으면 만유의 주재자요, 생령의 으뜸인 인간적 가치 기준을 세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공만 얻으면 천당 지옥이 나의 처소요, 선악적 행위에서 탈선되지 않는다. 공은 결합과 해소의 이중 작용을 영원에서 영원으로 계속하여 다하는 날이 없다.
부정이 긍정이요, 긍정이 부정이다. 대 진리는 대 모순이요, 극선은 극악이다. 마불(魔佛)이 하나요,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다. 너와 나도 하나다. 생사도 고락도 하나다. 영생은 영멸의 상대이다. 일체의 것은 표리(表裏)로 여윌 수 없는 하나로 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공의 것이 아닌 것은 없다. 몸도, 혼도, 나도, 다 공(空)일 뿐이다. 공은 빈 공이 아니기 때문에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생각의 집적인 일체혼을 이루며, 혼이나 몸은 물체이므로 변화적 작용으로 모였던 4대 원소(地水火風)로 돌아갔다가 또 다시 혼의 기준대로 무슨 형체로든지 바뀐다. 몸은 혼의 그림자이고, 혼은 생명의 심부름꾼이다. 그러나 현대인간인 우리는 거꾸로 몸은 혼의 감옥이고, 생명은 혼의 심부름꾼이 된 생활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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